2013년 4월 5일 금요일

김나영의 ´바닥論´ 외


<바닥에 관한 시 모음> 김나영의 ´바닥論´ 외

+ 바닥論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바닥에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 아니냐고 염려하지만
그 어느 날 바닥에...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안에 평화가 오더라.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뒹군다.
(김나영·시인, 경북 영천 출생)
+ 바닥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김수미·시인)
+ 호방한 바닥

바닥은 등 돌리지 않는다
서럽고 고단하고 골이 깊어도
더는 추락을 두고 보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모두 다 관대하게 받아준다
화려한 발자국도 초라한 흔적도
한때 지나가는 실바람일 뿐
영원한 것은 없는데
가소로운 허세들은 끝이 없지만
호방하게 가슴을 열고 있다
때로는 도약할 기반으로
희망을 주기도 하고
서광을 움켜쥐고 지켜보면서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바닥

벌떡 일어선 바닥이 말한다

네 등에 쓰레기 버리면 좋으냐
네 머리통에 껌 딱지 붙이면 좋으냐
네 얼굴에 침 뱉으면 좋으냐

갑자기 일어선 바닥에 놀라
소스라쳐서
전단지 한 장 버렸을 뿐인데요

똑같은 말에 지친다면서 말한다
바닥을 보시오
버려진 제각각인 양심들 널브러져 있다

부끄러운 양심
바닥을 향해 조용히 고개 숙인다
(이민숙·시인, 경북 문경 출생)
+ 바닥에 닿아야

눈물도 허공에서는
추락하는 빗물이다
볼을 타고 흘러
손바닥을 적셔야
비로소 눈물이 된다

번지점프를 하듯
자궁에서 뛰어 내릴 때도
허공에서는 울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아야, 비로소
첫 울음보를 터뜨리며
강보를 적셨다

수많은 발자국에 패인
길바닥 구덩이에 고여
철버덕거리며 걷는
바짓가랑이를 적시면
빗물도 눈물이 된다

토굴을 파던 앞발이
토담을 쌓는 손이 되었던
직립원인의 기적도
가슴 털을 적시는 눈물을 닦으려는
수십만 년 된 기원이었다

자궁 속 흙바닥에
굽은 등뼈가 닿아야
몸 속 깊은 곳, 마지막 눈물방울을
수의의 옷깃으로 닦고
잉카의 미이라처럼
보송보송한 잠을 품을 수 있다.
(김세영·시인)
+ 바닥을 본다

외로울 땐 바닥을 본다
가끔 내 생이 어디까지 왔나
궁금해질 땐 발바닥을 주물러본다
발바닥에 못에 찔린 자국 두어 점
먼 길의 통점이 각질로 굳어서 바닥을 보이고 있다
내 몸을 돌고 돌아 아직도 그믐처럼 어둑해질
이승의 길바닥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지
확인해 보곤 하는 것이다
외로울 땐 바닥을 더듬어본다
몸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과 먼지가 전생처럼 엉켜있다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손바닥에서는 강물 소리가 난다
손바닥으로 두 귀를 막고 들어보면
먼 들을 적시는 강물의 숨결이 자장자장 잦아들다가
왼손바닥과 오른손바닥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는
한동안 방목했던 울음들이 돌아와 콸콸콸 흐르기도 한다
합장할 때 누군가를 끝없이 불렀던 까닭이다
강물이 잦아들며 목쉰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다
강물이 깊어지는 건
흐르면서 제 안의 바닥을 몇 번이나 쓸어보기 때문이다
외로울 땐 바닥도 의지가 된다, 바닥을 본다
가끔 내 안의 바닥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더듬더듬 바닥을 만져본다
생의 굴절이 요철처럼 숙연하다
(신현락·시인)
+ 발바닥

내 그림자에 멱살 잡혀
질질 끌려오는 발!
아니 수레에 올려놓은 짐처럼
나를 헉헉 밀고 가는 발!
존재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라지고 없는 듯한
경계에 서 있는 발!
나보다 먼저 달아나면서
나를 놓쳐버린 저 발을
콱, 밟으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춘삼월에도 눈이 펄펄 내린다
슬슬 비도 내려 세상이 질퍽하다
발을 몸 속에 집어넣고
지렁이처럼 끌고 가자
배나 등을 눕혀 낮게 엎드려 가자
지워지는 발바닥으로만 가자
두려움 없이 드러누운 길이여
혹시라도 나를 밟고 가라
다시 일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게
다리 없이, 하늘과 멀어지거나
발 없이 땅과 가까워지거나
문밖으로 노출된 생이
진흙으로 새긴 문신만 남았다
결코 되물릴 수 없는 발바닥이
바닥의 끝에 닿았다
(김종제·시인, 강원도 출생)
+ 벽과 바닥

빛을 머금은 창이
바닥에 직사각의 빛을 드리운다

창을 빨아들이기 위해
바닥의 남은 몸은 온통 그늘이다

직사각의 빛 속에
누군가 삼각팬티를 널어놓는다

꽃병에 꽂힌 꽃처럼
삼각팬티는 피어나기가 무섭게 말라간다

명암에 따라 색이 변하는 꽃,
삼각팬티는 천천히 빛에서 그늘로 간다
그늘 속에서도 말라간다

결국 방은 어두워지고
그림자놀이를 하던 벽과 바닥은
등을 맞대고 있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꽃병은 사라지고 꽃만 남았다
(나희덕·시인, 1966-)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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