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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비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바다처럼 간다

바다처럼 간다 / 架痕 김철현

나는 간다.
바다처럼 나는 간다.
수 없이 할퀴고 지나간 뱃길 같은
상흔들에 가슴 풀어 헤치고
일렁이는 햇살에 따가워하며
삶이 긁힌 채로 바다처럼 간다.
끝없는 길 가보아도 만날 무엇도
있을 리 없지만 돌아서기엔 먼
바닷길에 띄워진 배이기에
차라리 바다처럼 간다.
바람이 불면 조급한 발걸음
파도가 일면 몸서리쳐지지만
폭풍 후에 고요함이 있다기에
나는 오늘도 그 위에 얹어진
세상을 업고 찌끼 가라앉은
바다처럼 흘러 흘러만 간다.

하영순의 ´가을 산´ 외


<가을 산에 관한 시 모음> 하영순의 ´가을 산´ 외
+ 가을 산

가을이란
꾸러기
장난이 너무 심했다

어쩌다
산에 불을 놓았나

소낙비도 못 잡는
저 불길
(하영순·시인)
+ 가을 산

그득하여 아름다운 건
단풍 든 숲
텅 비어 있어 아름다운 건
그 위의 하늘

숲이 하늘을 닮아
훌훌, 열병 앓는 껍데기
벗으려 한다
(권경업·산악인 시인, 경북 안동 출생)
+ 가을 산

베틀에 앉으신 어머니십니다.
사그락 사그락
어머니의 베 짜시던 소리가
발 아래에서 들립니다.
봄날의 씨줄과 여름날의 날줄
피 서린 손끝으로 엮으시어
이렇게 아름다운 풍요를
세상에 깔아주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배부르게 먹고 산 것 죄스럽습니다.
겨울을 준비하시느라
피땀으로 붉어지신 어머니의 등을
구경 삼아 오르내린 것도 죄스럽습니다.
(김윤자·시인, 1953-)
+ 가을 산

푸르게 더 푸르게 치받던 욕망들도
연륜이 깊어지니 시나브로 변합디다
저마다
남겨지고픈
모습으로 변합디다

힘 센 놈 틀어쥐고 올라서며 목을 죄던
칡넝쿨도 손을 놓고 느슨한 척 합디다
허물도
단풍이 드니
추억처럼 곱습디다
(최언진·시인, 경기도 광주 출생)
+ 시월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나희덕·시인, 1966-)
+ 가을 산

가을 숲을 홀로 거닐다보면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
사박사박 제 몸 풀어
내 발을 덮어주기도 한다.
칼라에서 흑백으로 모던에서 낭만으로
채널 돌린 듯 소박하게,
한껏 멋부려 입었던 옷을 벗고
속마음을 보여준다.

오래 전 꿈이 있었던 봄햇살의 풋풋함과
여름 하늘의 열정을 밑천 삼아
넉넉한 품으로 날 꼬옥 안아준다.
하루 일과로 꽁꽁 묶였던 스케줄도
잠 못 이루고 술렁였던 신경도
그래서 여기선 모두 짐보따리 풀고
낙엽처럼 느긋한 잠에 빠질 수 있다.

가을 산은 겉보기와는 다르다.
들어가 보면 그 진솔한 내면을 만날 수 있다.
메마른 꿈도 버스럭거리는 삶의 피로도
턱,
조였던 태엽을 풀고
역설이나 아이러니도 없이
그저 바람처럼 깔깔 웃게 만드는
가을산은 영락없이 푸근한 중년 아줌마다.
(윤꽃님·시인)
+ 가을 산은 자유롭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욕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무수히 붙어서 푸름으로 치닫던
잎새들의 갈망이 끝났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집착을 버리기 때문이다
잎새들을 붙잡고 무성했던 나무도
움켰던 손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을 소유하고 있던 여름이
여름을 울던 풀벌레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자라나야 한다든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묵직한 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한나·시인)
+ 가을 산

사방엔 온통 그대 모습

그대 이름 부르다
부르다
목젖에 걸려
피빛 울음
토악질한 수밖에

참으로 긴 날 가슴 태우며
기다렸는데
그대, 안부도 묻기 전에
그림자만 남기시는지

다시 마음 다칠까 두려워
두려워
그냥 빈 가슴만 안고
돌아왔네.
(김지헌·시인, 1956-)
+ 가을 산

가을 산에 앉아 있으면
산을 떠나는 가을의 발소리
껍질을 벗어버리고
가을을 떠나는 산들의 웃음소리
가을 산에 앉아 있으면
무성하게 자란 욕망들이
시든 풀과 한 빛이 되어 잠자고
절벽을 날으는 자작나무 잎
나뭇잎만 가지고
허공으로 지는 것을 본다
가을 산에 앉아 있으면
더 먼 곳으로 떠나는 산들의
가볍고 가벼운
웃음소리 발소리
(정군수·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조희선의 ´아침, 그대를 맞으며´ 외 "> 구광렬의 ´생일날 아침´ 외">

호수 -이형기-

어길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와 같이 눈을 뜨고 밤을 세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가는 바람에도
불고가는 바람같이 떨던것이

이렇게 고요해 질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호수와 같은것을
또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남겨진다는 것 -이풀잎-

잊어달라 얘기한 걸
미안해 하지마
사랑한다 해도
나는 괴로웠을테니
체념보다 더 슬픈 건
헛된 바램이지
사실은 나,
기대 속에 허물어지는 걸
홀로 남겨진 내 앞에서
떠나려는 너의 눈물은
좀 그렇잖니
이제는 거둬
기다림이 이별의 보상이라는
어설픈 위로에서
그만, 놓여나고 싶어
차라리
솔직한 너의 심정을 털어놔 줘
더 이상의 애씀은
오히려, 부담이될 뿐이라고



2013년 12월 28일 토요일

빠삐용

보지 좀 마
바쁘잖아
버스도 기다리고
신문도 봐야 하고
은행도 다녀와야 하는데
괜찮으니까 보지 좀 마

신경쓰지 좀 마
숨막히잖아
전기세도 내야 하고
카드값도 막아야 하고
애 성적도 신경써야 하는데
안 섭섭하니까 신경 좀 꺼 줘

생긴대로 살게
위로 받기도 싫고
칭찬도 충고도 싫어
제발이지
몰랐었다 생각해
아예 죽었다 생각하든지
어디가서 죽어버렸다 생각하고
내버려 좀 둬
누가 어디있냐 물으면
죽었다고 해 줘





중년에 만난 당신을 사랑하고


중년에 만난 당신을 사랑하고//이채
당신을 만난 것은 너무 늦은 시간이었어요

마음은 하나였어도
함께 걸어가기엔 난해한 길이었고
해는 저물지 않았어도
서로를 바라보기엔 조금은 어두웠어요

불빛이 켜지는 동안의 두려움에도
겉잡을 수 없이 사랑하고 싶었고
불빛이 꺼지는 순간의 보고픔에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았지만
그렇다해도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서로였지요

진작에 만나지 못한 당신을 사랑하고도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사람을 보내야 하는 사람의 슬픔에
밤은 짙은 어둠의 낭떠러지에서
차가운 별바람을 뿌리고 있었어요

끝내 놓을 수 밖에 없었던
손이 참 따뜻했던 당신이여!

그 후 한동안 열병을 앓고도
조용히 부르고 섰으면
메아리도 그리운 목소리여!

가끔 싸늘한 밤이면 당신의 이불을 덮고 잠이 듭니다






마음에 머무는 세상

마음에 머무는 세상

신의 오감은 바람으로 통하고
나무의 변함은 계절 따라
흙의 마음으로 통하네.

하늘을 이고
바다를 보듬고 살아가는
사바세계 저당 잡힌 몸

자연의 법칙대로
순응하며
무심으로 바라 볼 때
마음에 머무는 세상은

하늘처럼 맑고
바다처럼 한 없이 넓으니
그 무엇을 더 바랄까.

부처님 머무는 마음 닮아
마지막 그날까지
울창한 숲을 가꾸는
나무의 흙이 되리라.






투병鬪病

벽보가 붙고
전단지가 날리고
광목천이 울긋불긋 날리면
무엇이든 손에 집히는 대로 던졌다
광복이라는 이름으로 칼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총을
민주라는 이름으로
바위를, 돌을 깨뜨려 던졌다
게다가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쌀을, 비료를 던졌다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어서
던질 기력도 없어서
늙어 누워있는 나라의 당신 등짝에
상처가 예리하다
이제 곧 위기처럼
마지막 잎새가 지고
얼음의 계절이 들이닥치면
마침내 육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病과 싸워야 할 것인데
하루를 넘어가는 삶이 가파르다
당신이 가진 살과 뼈와 피를
손에 들고 그렇게 힘껏 던졌으니
내가 여태 숨쉬며 살았던 것 아닌가
그러니 목숨 이어 받은 내가
몸 가르고 던지겠다
상흔 같은 껍데기만 남겨 놓고
배 고픈 저들에게
한 끼 식량으로 나를 던져
세상의 病과 싸워 이겨야겠다

2월

모자란 자식이기에
깨물면
더 아픈 에미 심정처럼
2월은 아리다

제 살 녹여 흐르는
시냇물이 그러하고
아무도 몰래 새순을 수태한
겨울나무들이 그러하고
3월을 향한 솔솔한 그리움에
팔삭둥이 된 스므여드레가 그러하고

산파도 없이 봄을 낳은
2월을
옥양목 기저귀 빨아널듯
하얗게 봄햇살에 널어 말린다

봄바람 탄 기저귀 사이에
숨은 아이들과
진종일 술래잡기하며 노는
봄날





생명의 꽃밭

청보리 춤추는
봄이 돌아오니
산에 들에
꽃샘 바람 불고
거리마다 벚꽃 피네

황토 빛 대지위에
파릇파릇 꽃 잔디
너도나도 손잡고
나풀나풀 춤추네.

금빛 햇살 아래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풀빛 고운 꽃물결
사방천지 수를 놓았네.





푸른 안개가 있다

깊은 바다 아니면 어두운
숲속에서 걸어나왔을 것이다
잠시 은거할 곳이 필요하다고
내 속에 거미의 집을 짓고 있었다
스스로 만든 옥에 갇혔으니
벼랑에 위태롭게 서서
휘휘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는 봄만 알았지
굽이치며 흘러가는 꽃은 몰랐다
피기 전에 오는 것도
맺기 전에 가는 것도
풀빛이나 물빛을 가만히 닮았다
안개를 닮았다
내 속에서 불시에 한 세상이 열렸다
쉬지않고 손으로 부채질하며
껍질 밖으로
안개를 흘려 보내고 있으니
조금씩 조금씩 몸이 감춰지고 사라지고
푸른빛의 겉옷만 덩그렇게 남았다
그것이 바다의 살이고
뼈일 것이다
그것이 숲의 눈이고 입술일 것이다
그러니 안개에 저항하지 마라
푸른 빛을 거부하지 마라
모든 것의 끝에서
품고 가야할 前生이라
가볍게 안아주면서 어루만져주면서
감히 떼어낼 수 없게
폐속으로 혈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잠 시...

잠시 시대의 어지러움으로부터
그대의 눈과 귀를 돌려라.
그대의 마음이 스스로 정화되기 전엔
이 시대의 어지러움은 그대의 힘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것.

이 세상에서 그대가 할 일은
영원을 지키며 기다리고 응시하는 것
그대는 이미 이 세상사에
묶여 있고 또 물러나 있으니.

그대를 부르는 때가 오리니
그대 마음을 준비하고
꺼져가는 불길 속
마지막 불꽃을 위해
그대를 던지리라. -잉게 솔




하늘아 무너져라

밤은
휴지처럼 구겨진 골목길을 따라
슬며시 찾아와
오래 살아도 낯선 도시를
더 낯설게 한다

봄꽃 아래로 잠든
겨울의 빈자리엔
다시 사월이 자리하고

산다는 것은
쓰러지다 일어나는
남아있는 자만 아픈
쓸쓸한 세레나데

한번에 아주 한번에
하늘아 무너져라





정윤목의 ´후회´ 외


<후회에 관한 시 모음> 정윤목의 ´후회´ 외

+ 후회

오늘도 더 사랑치 못하였네
더 그윽한 관심 눈길 주지 못하였네
그 아이를 뜨거이 더 안아주지 못하였네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걸음걸음 사랑의 징검다리
선선히 놓아주지 못하였네

눈물
후회로운 하루 결산

그러나
내일 다시 태양은 높이 떠오르리니

눈물
가슴속 켜켜이 심어 살아갑니다
(정윤목·시인)
+ 후회

꽃은
내 앞에
환히 웃고 있는데
가시 찔릴까
가슴 대지 못 하고
서성이다가

꽃은
저만치 가고
가슴은
찔린 아픔 보다
더 큽니다
(손상근·시인)
+ 후회

때는
이미
늦었지만
같은 일
되풀이
하지 않을

교훈은 남긴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후회

세상 구경하고 싶은 참외
어느 날 지나가는 고슴도치 등에 업혀
가시에 찔리는 아픔 참고
큰 세상 요리하려 길을 떠났다

얼마 후 그는 발가벗기고
고슴도치 가족 식사 후
달콤한 후식 되었다
(김종익·시인)
+ 후회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오세영·시인, 1942-)
+ 후회

해준 것 없구나
사랑이여
반지도 팔찌도
옷도 구두고
집도 자동차도
해주지 못했구나
그대 목마를 때
한 종지 물만 건네주었구나
그대 눈시울 젖을 때
입술만 대어 닦아주었구나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말만
사랑이라는 말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구나
(나해철·의사 시인, 1956-)
+ 어떤 후회

물건이든
마음이든
무조건 주는 걸 좋아했고
남에게 주는 기쁨 모여야만
행복이 된다고 생각했어

어느 날 곰곰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더라구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 습성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함을
부끄럽게 깨달았어

주는 일에 숨어 따르는
허영과 자만심을
경계하라던 그대의 말을
다시 기억했어

남을 떠먹이는 일에
밤낮으로 바쁘기 전에
자신도 떠먹일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지녀야 한다던 그대의 말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기억했어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맨 날 허탕이다

노는 날이 내 앞에 버티고 서면
나는 조급증에 휘말려 들뜨고 만다.
우선 쉬는 날짜에 해야 할 일을 접목시키고
자투리를 찾아본다.
이를테면
노는 시간과 일할 시간을 맞대보는 거다.
그런데 언제나 한결같이
일할 시간의 키가 더 크다는 것에 짜증이 난다.
짧은 연휴라든가 긴 방학에도 늘
하고 싶은 일들이 줄줄이 고개를 들고
앞다투기에 열 오르다 보면
강단지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리던 마음의 뿌리가 통째로 뽑혀
이것도 저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만 거덜나고
그 자리에 허탈만 무성하게 자란다.
노는 날만 되면
친구 놈들 할 일 없이 빈둥대는데
나는 할 일에 깔려 캑캑대며 허덕이다가
결국 빈손 툴툴 털고 만다.
이룬 것 없는 빈 껍질만 뎅그렇게 남아
또 다른 노는 날에 기대를 걸어놓고
슬그머니 꽁무니 내리고 만다.
(돌샘 이길옥·시인)
+ 후회

동생이 보내준 편지를 읽으면
헤아림 없이 보낸
지난날들이 아프다.

이 아픈 날들이 하나, 둘...
나에게로 밀려와서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
빈 구석구석까지 파고든다.

비어 있음은 순수한 것인가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면서
욕심을 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욕심으로
마음 한 구석 비우지 못하고 살아온 나.

아, 나는 슬프다.
이제 절반의 내 생애도 덧없이 가버렸으니
이 슬픔,
뒤늦은 뉘우침에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후회하고
후회한다.

내일
또 내일의 후회를 위하여.
(이풍호·재미 시인, 충남 예산 출생)
+ 후회

하루가 안녕 하며 가는 모습이
이렇게 슬픈 줄 몰랐어요

지는 해도 아쉬워 노을이 되듯
저마다의 마음속
고운 빛깔로 있는 사람에게
아끼지 말고 듬뿍듬뿍 전해야겠어요

정말 고맙다는 말
정말 사랑한다는 말
보낸 후에야
하지 못했음을 아파하네요
(최영선·시인)
+ 후회는 말자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에 앉는다.

매일 아침 시 산책을 하기 위해서다
정든 임 마주치면
눈인사로 대신하고
동행이 없어 수다 없어 고요하다

아차!
커피가 있었지
무엇에 몰두했던지 옆에 커피 향을
잊고 있다가
그만 실수로 커피를 쏟아버렸다
아깝지만 어쩌겠나.
커피뿐 아니라 매사가 잠깐 실수 쏟아버린 물인 걸

흐르는 물은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쏟아버린 물을 아깝다 하지 말자

거듭하는 실수
인생은 미완성이 아니던가.
(하영순·시인)
+ 후회

될수록 적게 후회하는 사람이 되라.

교장이 되어 첫번째 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에게 큰소리 쳐놓고 점심 식사시간에 소주 몇 잔 급하게 취한 나머지 얼마 전 들어온 원고료 봉투에서 만 원 짜리 한 장씩 꺼내어 교직원이든 아이들이든 또 젊은 여자 학부형이든 눈에 띄는 대로 나눠주면서 호기를 부려보다.

그까짓 징그러운 돈 나도 한번 흔전만전 써보자 그랬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바람결에 돈을 날려보내며 깔깔거리듯 장난 삼아 그랬을지도 모르고 좀은 과하게 들어온 원고료 아무래도 군시러워 나눠 쓰자는 허장성세가 발동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쓰러져 자다가 새벽녘 목말라 물을 마시러 일어나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 막급한 밤이 지새기 전에 벌써 뱃속은 술 때문에 쓰리고 가슴은 후회로 쓰리다.

될수록 적게 후회하는 사람이 되라.
(나태주·시인, 1945-)
+ 후회

탁주 심부름 잦던 태곳적
보릿대 빨대 삼아
허기져 구시렁대는 내 뱃속 먼저 달래고
분명 고자질할 것 같은 주전자
냇물로 입막음했어야 했다

한 대접 드신 올챙이 아빠
미적지근한 헛기침 끝에
애먼 풋고추만 씹어
침묵이 오독오독 흐르던 툇마루
왜 그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심부름만큼 주량도 늘어
싹수가 노랗더니
술에게 되술래잡혀
휘청휘청 끌려온 인생길
아!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팔순 다 채우지 못하고
숟가락 놓으실 줄 알았더라면
진작 반주라도 톱톱하게 올려드릴 걸
저승 살이 맨송맨송해 어떻게 버티시는지
(권오범·시인)
+ 후회

그분이 살아 계실 때
봄이 오면 호박 심으러 가시고
강낭콩 심으러 가시고
가뭄이 오면 물 주러 가시고,

여름이 오면 골파씨 사다 심으시고
매일매일 하루에도 두 번씩
노력하신 것만큼 수확은, 씨에도 못 미치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정성을 다하실까?

나는 애써 만류했지만
날마다 봄마다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헛수고

고인이 된 지금 나는 어머니가 너무도 그리워
그 밭을 처음 찾아가 보았다.
산밑에 두세 평되는 메마른 땅

나는 왜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이 길을 한 번도 와 보지 않았나.....!

ː어쩌면 그렇게 한번도ː

어머니의 취미 생활을 이해 못하고
나는 왜 그렇게 만류했을까
어머니.....
(이월순·시인, 1937-)
+ 후회되는 일

입시철이 되면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그는 끈질기에 나를 따라잡는다
그것도 아픈 가슴으로

그날도 오늘처럼
가시만 남은 장미넝쿨 헤치며
눈발이 날리는 아침이었다

갓 시집 온 새색시였던 내가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대문 앞에 나와
경사진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그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들어오는 때였다

복음교회 쪽에서 내려오던
십구세 정도의 한 소년이
뜻밖에도
밥이 있으면 조금 달라고 했다

아침을 짓지 않아 밥이 없다는 나의 말과 함께
그는 벌써 그이가 내려간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분명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집을 나와 거리에서 방황하는 모습이었는데
몇 끼를 굶은 눈빛이었는데
밥이 없으면 짜장면 값이라도 줄 수 있었는데
(구순자·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이해인의 ´수선화´ 외">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침묵의 형태 - 서동균

침묵의 형태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조등을 보면
숨겨둔 마음을 들킨 것 같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엔 조등이 없어
거울에 비친 그 모습으로 문상을 간다
검은 구두, 검은 넥타이, 일렬로 선 조문객이
빈 두레박 같은 말을 내보인다
천신, 지신, 조상께 고하는 향이
늦반디처럼 몸을 사르다 바닥에 뼈를 묻는다

숨겨둔 물은 달이 될 때가 있다
캄캄한 내면에 그림자를 보여주다가
그림자를 밖으로 끄집어내기도 하고
정한수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있는
그냥 달이 되기도 한다
가끔 바람이 찾아와
젖은 달을 가져가기도 한다

전자서명을 하는 녹명부錄名簿에
사설조의 곡소리 대신 침묵이 선명하다
봉투에 오돌도돌 인쇄된 부의賻儀 글자처럼
뼈가 드러난 말이
뒤엉킨 구두소리에 순간 어수선해지고
한 무리의 조문객이 왁자지껄 멀어진다
2012년 <문학청춘> 봄호에서 발췌

김현승의 ´고독한 이유´ 외 ">

비상구가 없다

나의 사계는
내전으로 폐허가 된
아프리카 초원 같다
봄은 소싯적부터 불이 붙었다
연기 자욱하게 타올라
재가 된 초가집이다
물 먹은 여름은
아랫도리 무거워 지층 바닥까지
가라앉은 호수다
입술 적실 물이 없다
모래 바람 세차게 부는 가을은
상처 드러나는 시간이므로
짐승의 등뼈거나 해골이다
지금 겨울 국경에는
철조망만 높고
고개 숙이고 빠져나갈
비상구가 없다
나의 한 해는
감시의 눈초리만 번뜩이는
임시 수용소 같다
사방 천지, 당신에게 가는
출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너무 많은 길을 돌아왔으므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구원의 신호처럼
어디선가 별빛 반짝인다고 해도
들어 오고 나가는 길이란
내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늘 바깥으로 비상할
구멍이 없다

박성룡의 ´풀잎´ 외


<풀잎에 관한 시 모음> 박성룡의 ´풀잎´ 외

+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박성룡·시인, 1932-2002)
+ 풀잎

나는
풀잎을 사랑한다.
뿌리까지 뽑으려는
바람의 기세에도
눈썹 치켜올리는
그 서릿발같은 마음 하나로
참고 버티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빗물에 휩쓸려간 자국도
푸르게 메워내고
겨울에 얼어죽는 부분도
입김을 불어넣고
뺨을 비벼주어
다시 푸르게 살려내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아침이면 이슬을 뿜어 올려
그 이슬 속을
새소리 왁자하게 밀려나오게 하고
착하디착한 햇빛을 받으러
하늘로
올려보는 조그만 손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가만히 허리를 일으켜 세워주면
날아가고 싶어
날아가고 싶어
바람에 온 몸을 문질러 보는
초록빛 새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이준관·시인, 1949-)
+ 풀잎은

풀잎은
씨앗이 모진 추위를 견디라고
딱딱한 껍질을 덮어 주지만

봄이 오면
새싹이 될 씨눈 하나를
씨앗 속에 몰래 감추어둔다.

풀잎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작고 부드러운 것만이
딱딱한 땅을 헤치고 올라와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공재동·시인, 1949-)
+ 풀잎이 아름다운 이유

풀잎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바람의 향기를 알았기 때문이다.

바람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풀잎은
바람의 향기를 사랑할 뿐
절대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풀잎이 아름다운 것은
바람의 향기를 사랑하고도
그 바람에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무화·시인)
+ 예쁘게 살아가는 풀잎이 되어요

우리 아름답게 일어서는 풀잎이 되어요
바람찬 날 강 언덕 아래 웅크려
세월의 모가지 바람 앞에 내밀고
서럽게 울다가도
때로는 강물 소리 듣고
모질게 일어서는 풀잎이 되어요
누가 우리들 허리 꼭꼭 밟고 가도
넘어진 김에 한 번 더
서럽게 껴안고 일어서는
아니면 내 한 몸 꺾어 겨울의 양식 되었다가
다시 새 봄에 푸른 칼날로 서는
우리 예쁘게 살아가는 풀잎이 되어요
(공광규·시인, 1960-)
+ 셋방살이

풀잎이
전세를 놓았다

풀벌레가
전세를 얻었다

풀잎은
전세 값으로 노래를 받아
날마다 기뻤다

풀벌레는 전세 값으로
노래를 주어
날마다 즐거웠다.
(정갑숙·아동문학가, 1963-)
+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이승훈·시인, 1942-)
+ 비에 젖은 풀잎을

비에 젖은 풀잎을 밟고 오시는 당신의 맨발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당신의 나신
종아리에 핏빛 여린 생채기 진다.
가슴팍에 예쁜 핏빛 무늬가 선다.
(나태주·시인, 1945-)
+ 풀잎으로 나무로 서서

내가 풀잎으로 서서 별을 쳐다본다면
밤하늘 별들은 어떻게 빛날까.
내가 나무로 서서 구름을 본다면
구름은 또 어떻게 빛날까.
내가 다시 풀잎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 다시 나무로 서서 나를 본다면
나는 진정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걸어갈까.
내가 별을 쳐다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풀잎들도 별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나무도 나를 보고 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풀잎

나직이 부르는 노래가
진정 노래예요
거센 함성 없지만
끊어질 듯 살아오는 그 끈질긴
힘의 목소리예요
빛이예요
온 천하가 어둠에 갇혀
방향 없이 바람에 밀려도
눈물로 일어서는 소리
우리 긴 기다림의 서러움이
진정 새로움의 노래예요
(김종우·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이창건의 ´풀의 말´ 외 ">

그대와 나.43

오늘은
그대안의 나를 보고 싶습니다
그대 가슴속 나는 감춰지고
그대 있음으로 더욱 나일 수 있는
그대안의 나는 그대로 하여
더욱 그대일 수 있는

나 그대로 하여 감춰져도
기쁨으로 무릎꿇을 수 있는
잘 마른 낙엽처럼
나무 아래 드러누워
겨울 맞을 수 있는

첫눈 내리는 날 오후
마른 낙엽 통하여
더욱 든든히 뿌리로 서서
내 썩어가는 몸으로
그대 뿌리 견고해 질 수 있는
오늘은 그대로 하여 깊어지는
그대안의 나를 보고 싶습니다





망초꽃이 웃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길옆에 망초꽃이
수북이 피어있는 까닭을

초록의 잎사귀로
설레게 하는 노란 눈빛을

수풀 사이로 푸드덕 날아 오르는
때까치가 전하는 급보를

그렇게도 장마비가 쏟아지는 밤에도
하나 둘 피어 가는 하얀 그리움 펼쳐진다

흰눈 처럼 구름 처럼 내려 앉은 다정함
어느 땐 웃고 울으며 함께 지샌 밤들을

나는 모른다
푹푹 찌는 더위도 요란스런 장맛비도
마음 다독여 하얀 웃음 짓는 이유를

바람의 눈길 피해 사라지면 그만인데
한 줄기 초록 대롱에 매달린 정 때문에
울지도 못하고 하얗게 웃는 까닭을
나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