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하영순의 ´가을 산´ 외
<가을 산에 관한 시 모음> 하영순의 ´가을 산´ 외
+ 가을 산
가을이란
꾸러기
장난이 너무 심했다
어쩌다
산에 불을 놓았나
소낙비도 못 잡는
저 불길
(하영순·시인)
+ 가을 산
그득하여 아름다운 건
단풍 든 숲
텅 비어 있어 아름다운 건
그 위의 하늘
숲이 하늘을 닮아
훌훌, 열병 앓는 껍데기
벗으려 한다
(권경업·산악인 시인, 경북 안동 출생)
+ 가을 산
베틀에 앉으신 어머니십니다.
사그락 사그락
어머니의 베 짜시던 소리가
발 아래에서 들립니다.
봄날의 씨줄과 여름날의 날줄
피 서린 손끝으로 엮으시어
이렇게 아름다운 풍요를
세상에 깔아주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배부르게 먹고 산 것 죄스럽습니다.
겨울을 준비하시느라
피땀으로 붉어지신 어머니의 등을
구경 삼아 오르내린 것도 죄스럽습니다.
(김윤자·시인, 1953-)
+ 가을 산
푸르게 더 푸르게 치받던 욕망들도
연륜이 깊어지니 시나브로 변합디다
저마다
남겨지고픈
모습으로 변합디다
힘 센 놈 틀어쥐고 올라서며 목을 죄던
칡넝쿨도 손을 놓고 느슨한 척 합디다
허물도
단풍이 드니
추억처럼 곱습디다
(최언진·시인, 경기도 광주 출생)
+ 시월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나희덕·시인, 1966-)
+ 가을 산
가을 숲을 홀로 거닐다보면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
사박사박 제 몸 풀어
내 발을 덮어주기도 한다.
칼라에서 흑백으로 모던에서 낭만으로
채널 돌린 듯 소박하게,
한껏 멋부려 입었던 옷을 벗고
속마음을 보여준다.
오래 전 꿈이 있었던 봄햇살의 풋풋함과
여름 하늘의 열정을 밑천 삼아
넉넉한 품으로 날 꼬옥 안아준다.
하루 일과로 꽁꽁 묶였던 스케줄도
잠 못 이루고 술렁였던 신경도
그래서 여기선 모두 짐보따리 풀고
낙엽처럼 느긋한 잠에 빠질 수 있다.
가을 산은 겉보기와는 다르다.
들어가 보면 그 진솔한 내면을 만날 수 있다.
메마른 꿈도 버스럭거리는 삶의 피로도
턱,
조였던 태엽을 풀고
역설이나 아이러니도 없이
그저 바람처럼 깔깔 웃게 만드는
가을산은 영락없이 푸근한 중년 아줌마다.
(윤꽃님·시인)
+ 가을 산은 자유롭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욕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무수히 붙어서 푸름으로 치닫던
잎새들의 갈망이 끝났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집착을 버리기 때문이다
잎새들을 붙잡고 무성했던 나무도
움켰던 손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을 소유하고 있던 여름이
여름을 울던 풀벌레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자라나야 한다든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묵직한 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한나·시인)
+ 가을 산
사방엔 온통 그대 모습
그대 이름 부르다
부르다
목젖에 걸려
피빛 울음
토악질한 수밖에
참으로 긴 날 가슴 태우며
기다렸는데
그대, 안부도 묻기 전에
그림자만 남기시는지
다시 마음 다칠까 두려워
두려워
그냥 빈 가슴만 안고
돌아왔네.
(김지헌·시인, 1956-)
+ 가을 산
가을 산에 앉아 있으면
산을 떠나는 가을의 발소리
껍질을 벗어버리고
가을을 떠나는 산들의 웃음소리
가을 산에 앉아 있으면
무성하게 자란 욕망들이
시든 풀과 한 빛이 되어 잠자고
절벽을 날으는 자작나무 잎
나뭇잎만 가지고
허공으로 지는 것을 본다
가을 산에 앉아 있으면
더 먼 곳으로 떠나는 산들의
가볍고 가벼운
웃음소리 발소리
(정군수·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조희선의 ´아침, 그대를 맞으며´ 외 "> 구광렬의 ´생일날 아침´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