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8일 일요일
김현승의 ´꿈을 생각하며´ 외
<꿈 시 모음> 김현승의 ´꿈을 생각하며´ 외
+ 꿈을 생각하며
목적은 한꺼번에 오려면 오지만
꿈은 조금씩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지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ㅡ 끝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김현승·시인, 1913-1975)
+ 나의 꿈
돌멩이로 빵을 만든다
흙으로 밥을 짓는다
풀잎으로 반찬을 만든다
강물로 국을 끓인다
함박눈으로 시루떡을 찐다
노을로 팥빙수를 만든다
이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정호승·시인, 1950-)
+ 애기의 꿈
애기의 꿈속에 나비 한 마리
어디론지 날아가고 햇빛만이 남았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난 애기는
창구멍으로 방바닥에 스며든 햇빛을
눈 대보고, 뺨 대보고, 만져 보고 웃는다.
엄마도 애기 같이 이렇다면은
세상은 정말로 좋을 것이다.
(서정주·시인, 1915-2000)
+ 꿈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낮에 본 꽃이 눈 안에 가득 자리를 잡는다
마치 이른 새벽
꽃시장 골목을 뒤지는 발길처럼
촉각은 망막에 꽃씨를 뿌리며
봄,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흙을 뒤집는 꿈을 꾼다.
(문인귀·시인, 1939-)
+ 꿈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지
논두렁 개울가에
진종일 쪼그리고 앉아
밥 먹으라는 고함소리도
잊어먹고
개울 위로 떠가는
지푸라기만
바라보는
열 다섯 살
소년이 되어보는
(서홍관·의사 시인, 1958-)
+ 해녀의 꿈
욕심 없이
바다에 뛰어들면
바다는
더욱 아름다워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사랑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암초를 헤치며
미역을 따듯이
전복을 따듯이
힘들어도
희망을 꼭 따오겠어요
바다 속에
집을 짓고 살고 싶지만
다시 뭍으로 올라와야지요
짠 냄새 가득 풍기는
물기 어린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ㅡ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꿈
1
빈 언덕 위에
키 큰 상수리나무 하나를 둘 것
그 아래 방 한 칸짜리
오두막집을 둘 것
그리고 하늘엔
노을 한 자락도 걸어 둘 것.
2
흙내 나는
오두막집 방안으로 돌아가고 싶다
따스한 아랫목의
잠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외할머니
옆에 계시고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하고 속살거리는
상수리나무 마른 잎
무엇보다 먼저
내 몸이 작아지고 싶다
(나태주·시인, 1945-)
+ 꿈
주렁주렁
매달린
꿈
턱 괴고 모로 누워
그저 절로
떨어지기만
농익은 꿈이
짓물러 터지면
허사인걸
나무에 올라가
가지 흔들어
작대기로 후려쳐
기다리는 꿈은
결코
꿈이 아니야
(공석진·시인)
+ 개꿈
개꿈을 꼬치꼬치 물어볼 필요는 없다
까닭 없이
주먹질하고 도망치고
쓰러지고 붙잡히고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바윗돌에 부딪치고
절벽에서 실족하는 순간
그 실족이 나를 구했다
그래도 이 고마운 구조를
개꿈이라고 하기엔
아깝다
(이생진·시인, 1929-)
+ 어느 날의 꿈
그대 세상에 나를 심어요
빈들 채우는 실바람처럼
나는 당신의 거목이 되어요.
세상이 나를 위해 없는 것처럼
나를 위한 당신이 숨겨진 것처럼
나는 당신을 위해 곡괭이를 들어요.
일기장에 당신을 매일 묻어요
책 안에 읽던 곳 표시하는 것처럼
내 맘에 매일 갈피를 꽂아요.
새벽은 도둑 비에 젖어요
녹슨 종탑 십자가가 녹는 것처럼
나는 당신에게 스며요.
(김현영·시인)
+ 오늘 밤 꿈속에선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조촐한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나오면서
우리의 장래를 약속할 수 있는
한 남자가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예쁜 딸아이를 낳아
젖먹이고 씻겨 키우면서
손잡고 유치원 가면서
´나도 엄마처럼 커서 여자 될래´
귀여운 아이의 엄마로 살았으면 좋겠다
새벽이면 일어나 콧노래 부르며
아침을 차리고 손수건도 챙기는
바쁜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봄날이면
하얀 블라우스에 주름치마를 입고
스타킹도 신어야겠지
구두는 무슨 색깔이면 좋을까
그이랑 함께 야유회도 갈 수 있을 텐데
오늘 밤 꿈속에선 그이를 만났으면 좋겠다
(김옥진·시인)
+ 꿈꾸는 병(病)
소녀는 질병을 앓았다.
기울어진 햇빛 속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사熱砂의 지평地平을 달리는
한 마리 사자獅子,
소녀는 사랑을 꿈꾸었다.
잠 못 드는 밤엔
세계의 끝에서 숨쉬는
에프엠을 듣고
병든 지구에 내리는 빗물처럼
울 줄도 알았다.
러브스토리를 읽으며
인생과 예술이 술잔 속에서
페시미즘에 젖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 사자獅子가 낮잠을 자는
아프리카 해안의 부서지는
푸른 파도.
소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다만 하나의 희망이
어떻게 이 지상에 잠드는 것인가를
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
사람들이 각기 등불을 켜 들 때도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으로, 꿈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오세영·시인, 1942-)
+ 다시 꿈꿀 수 있다면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오백 날쯤
살아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히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향기가 악취 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 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내게 하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神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박라연·시인, 1951-)
+ 얼굴
어제는
수정 같이 맑은 물 흐르는
강가를 걸었어요
밝은 햇살 아래
물빛 원을 그리며 춤추는 조약돌은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희고 동그란 바위에 앉아
빨간 단풍이 병풍처럼 그려진
계곡을 바라도 보았지요
저 멀리서
물위를 걸으며 웃으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어요
걷다가 걷다가 멈추어서니
아버지는 사라지고
짙은 어둠만 시야를 가렸어요
아~ 꿈이었어요
너무 아쉬워 다시 눈감았지요
이 밤 한없이 꿈길을 거닐고 싶어
(탁정순·시인, 1966-)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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