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2일 금요일

이영균의 ´커다란 어머니의 귀´ 외


<귀에 관한 시 모음> 이영균의 ´커다란 어머니의 귀´ 외

+ 커다란 어머니의 귀

어머니의 귀는 눈에 달렸다
팔순이 넘으신 만큼 크시다
자식들 말에 귀 기울일 때는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들으신다
눈이 잘 보이질 않아 귀가 더욱 커지신다

전화기로 아들의 음성 들으실 땐
눈이 아닌 마음의 귀로 들으신다.
˝밥은 먹언, 그래 알았다. 어서 오너라.˝
어떤 물음에도 언제나 같은 대답
깊은 가슴속에 담긴 사랑이다

그 가슴엔 몇 개의 귀가 더 있다
손녀딸의 음성을 듣는 귀
며느리 음성 알아듣는 귀
작은아들 음성 듣기 등등

보청기를 해드리면 귀가 좀 가벼워지실까
하지만 마음의 귀가 닫힐까 조심스럽다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셔도
자식들 음성만큼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어머니만의 사랑의 귀이기 때문이다
(이영균·시인, 1954-)
+ 귀로 쓴 시

햇살의 고요 속에선
ㅉㅉㅉ, 소리가 나고
바람은 쥐가 쏠 듯
ㅅㅅㅅ, 문틈을 넘고
후두엽 외진 간이역
녹슨 기차 바퀴소리
(이승은·시인, 1958-)
+ 귀가 없을 때 - 매미

매미는 귀가 없습니다
귀가 있었던들 저렇게 큰 소리로 울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아직 청력이 좋습니다
나도 귀가 없으면 저렇게 큰 소리로 울 겁니다
(이생진·시인, 1929-)
+ 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보다 투명한 우리들의 귀.

하찮은 이야기에도
놀라기를 잘해
잠자는 시간에도 닫혀지지 않고
문 밖에 나가 쪼그려앉은
가엾은 우리들의 귀.

이 세상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수도꼭지에서 방울방울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 동그란 소문 속으로 들어가버린
편리한 우리들의 귀.
(강인한·시인, 1944-)
+ 노루귀

너를 오래 보고 있으면
숨소리는 작은 꽃잎이 될 듯도 싶다
너를 오래오래 보고 있으면
귀는 열려 계곡 너머 돌돌 흐르는 물소리
다 들을 수 있을 듯도 싶다
아, 가지고 싶었던 것 다 가진 듯
내 마음속에 등불 하나 환히 피어나
밤길을 걸을 듯도 하다
마음으로 잡고 싶었던 것들
이제는 다 놓아줄 것도 같다
너를 보고 있으면
(김윤현·시인, 1955-)
+ 마음의 귀

파르스름하게 타는 진공관 불빛을 보며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지천명을 턱걸이하면서
어두워진 눈이 책을 자꾸 밀어낸다
빈약한 진공관 소리를 더 모으느라
귓바퀴 말끔하게 닦으면서
문득 말년이 되어 사랑하는 이 보내고
어두워진 귀로 일궈낸
첼로의 선율 더욱 살가운 건 왜일까
다발성 경화증 딛고 일어선 뒤프레가
다리 놓은 베토벤의 선율 위에
문득 단풍나무 한 그루 놓여 있다
저렇듯 척박한 땅에서 무엇이 자랄까
방관자들의 어설픈 걱정을 딛고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핏빛 뿜어올린
단풍나무 한 그루
때묻지 않은 저녁놀 흩뿌린다
어두워진 귀 넘어 막힌 핏줄 넘어
맑고 깊은 영혼 눈뜬다
(박몽구·시인, 1956-)
+ 귀

별이라도 있었으면 덜 심심하겠다
어두운 나무에 대고 농 삼아 말을 걸었더니
정말 별 뜬다 신기하다
올려다보니, 나무에 온통 팔랑이며
내 말을 알아듣는 귀!
(박윤규·시인, 1963-)
+ 귀에 들리는가

귀에 들리는가
애달픈 사연
가슴을 치며 통탄하는
억울한 이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가
재야의 종소리
서러운 사연
통곡하는 목소리가.

귀에 드리는가
굶어 배고파
죽어 가는 네 형제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가
사랑에 지쳐
삶에 지쳐
한숨짓는 이웃의 목소리가.
(윤용기·시인, 1959-)

+ 귀 깨물기

십 오 년도 훨씬 지난 오래 전에
술을 마시고 오면 작은애 귀를
아프지 않게 깨물곤 했었습니다

아이는 달아나면서 말했습니다
˝내 귀 떨어지면 어떡해요
귀 좀 깨물지 마세요˝

그러면 난 말하곤 했답니다
˝네 귀를 깨물면 힘이 난단다˝

어느 아주 늦은 밤 퇴근길에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작은애가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아빠, 내 귀 깨물고 힘내세요˝
(강인호·시인)
+ 귀를 열면

전신주를 할퀴던 가시바람이
울며 떠난 3월
안양천 뚝에 앉아 귀를 열면
먼데서 들려오는 江 풀리는 소리
꽃망울 터지는 소리
여린 버드나무 줄기
연둣빛 드는 소리
바람 흐르듯 삶도 지나
꽃물 얼룩진 빈 가슴엔
진달래 흩어지는 소리
이슬비 젖는 소리.
그저 눈감고
다시 올 겨울의
칼날 같은 바람에
귀기울여 본다
(이길원·시인, 1945-)
+ 귀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상한 귀
모터 돌아가는 소리 십 년이 넘었다
그칠 줄 모르는 귀 울음 점점 심해져서
세상의 소리들 갈수록 들리지 않는다

누가 내게 불러주는 아름다운 노래도
누가 쓰러져 지르는 고통스런 비명도
내 기계 고장난 소리도
새 우는 소리도 바람 소리도 파도치는 소리도

영영 듣지 못하면 어쩌나

육신의 귀 잃고
혼자소리로써 세상을 다 이를 수 없으니
마음에 귀 하나 열려 다오
그 소리들 언제까지나 듣고 싶다.
(조기조·시인, 1963-)
+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 새 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지구(地球)를 끌어안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수준기(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시인, 1968-)
+ 아내 - 귀지

아내에게 귀지를 파달라 했다
나는 은근히 그미의 무릎을 즐기고
아내는 귀찮은 듯하면서도
키득키득거리는 내 가려움을 즐긴다

어둡고 비밀스러운 내 과거를 캐는 듯
아내의 작업은
훨씬 집요하고 은밀하다

부스러진 귀지를 훅, 불어내며
세상에 대해 늘
꽉 막힌 귓구멍을
답답한 그 삶을
의아해 한다

나는 아내의 다른 쪽 무릎을 탐하여
돌아눕는다

혹여 몰래 감춘 사랑 하나 들키고 말지라도
내 나머지 귓구멍을 아내에게
전폭적으로 맡긴다
(김영천·시인, 1948-)
+ 귀기울이자

언제
귀기울인 적 있었던가
마음을 열었었나
가면을 쓰고
막춤만 추었지
허튼 넋두리라도
귀담아 두었더라면
흐름을 끊진 않았으리
아직도 늦지 않았어
귀기울이자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귀명창

참다래를 먹을 때면 꼭
작은 씨가 입 안에 남습니다
잘 넘어가지 않는 고 작고 까만 것을
뱉지 않고 꼭꼭 씹어 봅니다
까칠한 것이 아무 맛없는데

고막을 두드리는 콕, 콕, 소리가
소리의 길 하나를 새로 엽니다

혀끝 놀림이 앞니의 절묘한 보조를 받아
기어이 목으로 넘기는 순간
되살아납니다 이미 삼키고 없는
달고 보드라운 과육의 느낌,
때늦은 사랑 맛입니다
일찍 부화한 슬픔 날리고 음미하는 회상,
사라지고 없는 것에 보태지는
간절함 그 맛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귀를 열어 놉니다
소리의 우담바라가 귓등에 하나둘 피어납니다
쫑긋 귀 기울이다 보면 귀명창이 되어
세월을 품평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정란·시인, 1959-)
+ 귀를 자른 자화상

보기만 하리
누가 산울음 소리로
나를 불러도
귀를 막으리

땅에는 여름 숲 우거지고
동굴처럼 패여
소용돌이치는
저 궁창의 깊고 깊은
별과 달

누가 밤새도록 깨어서
거기 오색 빛깔 실어다가
퍼붓는 것을
눈만 뜨고 보리

날 부르는 소리
창자가 꼬여들어도
말하지 않으리
두 눈만 뜨리
(이향아·시인, 1938-)
* 빈센트 반 고호의 <귀를 자른 자화상>을 보면서
+ 귀가 돋는다

귀머거리 일년
이비인후과에서도 포기한
귀의 적막이 어금니를 흔든 것일까

치과에서 턱이 아프도록 허공을 악물다 놓으니
여린 소리 하나가 가만가만
귓속을 간질인다
고목에 새순이 돋듯 내 귀가 살아난다

열병 끝에
버스 클랙슨도 돌려세우던
캄캄한 내 귀,
막힌 터널을 뚫고
구불구불 달팽이관을 돌고 돌아
오른쪽 귓불에 날아든 바람, 소리,

파릇파릇 귀가 돋는다
소리가 돋는다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가는 귀 먹었다

내 귀는 잘 들리지 않아…… 가는 귀 먹었다
의사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데…… 나 혼자만 가는 귀 먹었다
소리가 들리거든 손을 드세요
째깍째깍…… 왼손
째깍째깍…… 오른손
이상이 없다 이상이 없다 …… 가는 귀 먹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가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침묵만 듣는다
초침 움직이는 소리는 잘도 들리더니
나 몰래 속삭이는 소리는 잘도 들리더니
여름날 모기 날개 움직이는 소리까지 잘도 들리더니
내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하는 당신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는 귀 먹었다
가는 귀 먹는다… 다시 한 번 먹는다
가끔 침묵만 듣는 내 귀가
먹어도 먹어도 나를 배고프게 한다
배부르게 살고 싶다…… 당신을 먹고 싶다
(강수·시인, 1968-)
+ 나무

속상한 일이 있어
마음 괴로울 때면

나무 그늘 밑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 헤아릴 수 없는
잎새들처럼

이 가슴속 쌓인
수많은 사연들

하나 둘 셋....
나무에게 이야기하면

나뭇잎들은 일제히
귀를 쫑긋 세운다

어느새 내 마음도
푸른 잎새가 된다
(정연복·시인, 1957-)
+ 바늘귀 속의 두근거림

바늘을 들여다본다. 바늘귀가 두근거린다. 깁고 이어붙이고 꽃봉오리 같은 단추를 매달아주기 위해 바늘은 오늘도 온몸으로 귀기울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사물들은 자연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 있다. 바늘은 당신 속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 있다. 최초의 바늘은 아마도 짐승의 뼈였으리라. 구멍이 뚫려 있는 날카로운 뼈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구멍에 가죽실을 꿰었던 최초의 석기인들을 생각한다. 벗은 몸이 추웠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벗은 몸의 아이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연민하고 글썽이며 두근거리던 마음이 최초의 뼈바늘로 최초의 가죽옷을 지었을 것이다.
(김선우·시인, 197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신석정의 ´오월이 돌아오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