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7일 토요일
임보의 ´완전한 부부´ 외
<부부의 날 특집 시모음> 임보의 ´완전한 부부´ 외
+ 완전한 부부
남편은 장님이고
아내는 앉은뱅이
그들은 따로 따로 살 수 없지만
부부가 되어 잘 살아간다
남편은 아내의 발이고
아내는 남편의 눈이다
남편의 등에 업힌 아내가 앞을 보고
아내를 업은 남편이 길을 간다
아내를 밭에 갖다놓으면 김을 매고
아내를 시장에 데려가면 장을 본다
두 불구가 만나 하나로 완성된
동심일체 완전 부부
온전한 사람들은
다 결손 부부들이다
(임보·시인, 1940-)
+ 부부(夫婦)
돌아서서
한번 손을 흔들면
생소한 이웃이 되고
말 인연을 짊어지고
집요하게
숨어드는
한 칸의 작은 우리.
검은
머리채로
너의 가슴을 덮고
피가 뿜어지는 얘기를 듣는
밤엔
외면하고 싶은
생활도 잠시
어둠에 숨는다.
태고에 점지(點指)하여
외로움을
저당하고 얻은
또 하나의 외로움.
애증(愛憎)을 다투면서
가난하게 기대인 약속의 방에
덧없는 꽃이라도
놓아보는
마음이여.
(강계순·시인, 1937-)
+ 부부 인연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함이
시소처럼 평형이 맞아서만 아니고
서로의 잡고 있는 연(緣)에 의함이 크다
조건보다
어느 하나 둘이 모자란다 해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 인연일 수도
첫 만남
첫 느낌
마음의 움직임이 연일 수 있다
그 인연이 씨앗을 틔우고
정(情)이란 잎이 생겨
사랑의 고동이 울려 퍼진다
부부란 같은 배를 타고
서로 행동을 조절해야
아름답고 좋은 항해가 되는 것
때로 악풍을 만나 큰 풍랑이 일어도
부부가 방향계를 조절하여
행복의 꽃을 피우려 끝없이 노력하는 것.
(박태강·시인, 1941-)
+ 수작酬酌
당신 왜 나랑 결혼했어?
싱겁기는, 당신 수작에 넘어간 거지 머
아내랑 농을 주고받다 생각하니
수작이란 그 말
잔을 섞어 수작이요
말을 섞어 수작이요
마침내 몸을 섞으니 수작이라
수작이라는 그 말, 듣고보니
얼마나 설레는 말이냐
수작 한 번으로 아내를 갖고
수작 두 번으로 아이 둘을 가졌으니
수작이라는 그 말
얼마나 신통방통한 말이냐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수작에 넘어갔다는 그 말도 맞고
딴 데서 수작 걸지 말라는 그 말도 맞다!
(박제영·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
행복해서 자지러지게
웃는 그대의 모습이
보고 싶다
하얀 구름이 휘어감은
산자락처럼
그대를 안고
서로 몸 비비며
거친 숨결이 온몸에 단풍처럼 타오르도록
하나가 되는 사랑을 하고 싶다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기웃기웃 눈치 보며
사랑할 필요가 없다
혀끝으로 다가오는 감촉만으로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기에
서로의 마음을 확 열어놓아
꼭 빠지면 빠질수록 좋기만 하다
우리는 하늘의 허락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니까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성인(聖人)
못생기고
재미없고
배경 없고
능력 없는
나 만나 다 늙었다고 아내 등 쓸어줍니다
나 만나 고생했다고 남편 손 잡아줍니다
(김일연·시인, 1955-)
+ 늙은 부부
오래 살아서
등이 굽은 소나무 두 그루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수저질 한다
푹 익은 된장과 고추장 담고
뚜껑에 흰 눈 수북히 얹고 있는
겨울 장독 항아리 풍경이다
늙은 부부는 머지않아
흰 쌀밥 수북한 제사상 놋쇠 밥그릇으로
같이 앉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공광규·시인, 1960-)
+ 노부부
아침 산책길
언제나 만나는 노부부
지팡이 짚고
나란히
참 정다웁구나
저분들은
부부싸움이란 말
모를 거야
어젯밤에도
한바탕 전쟁을 치른
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이문조·시인)
+ 오래된 약속
편운재로 강의하러 가기 전날 밤
아내가 신병으로 몸져누웠다.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할지
한동안 R. 프로스트 말처럼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그 말의 주인처럼
강연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안성으로 달리는 차창에
아내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다.
아, 그렇구나!
강연약속은 한 달 전쯤의 일이지만
우리는 50년 전에
사랑을 약속했지.
참 오래 전 선약.
그래, 나는
70세 시인으로 집을 나섰지만
20세 청년으로 귀가할 것이다.
(김대규·시인, 1942-)
+ 부부의 배
1톤 짜리 낚싯배
거기에 목숨을 걸었다
새벽부터 나온 목에 목도리 동동 감고
갯바람을 피하는 부부
시동이 산을 울리고
다시 골짜기 물로 내려온다
4대에 내려오는 돌담집
지붕만 갈았지 한 번도 문을 잠가본 적이 없는 집
이렇게 부부가 한배에 타는 것도 운명이다
(이생진·시인, 1929-)
+ 자전거 탄 부부의 풍경
자전거를 앞뒤로 사이좋게 타고
가정이란 안장 위에 앉아
함께했던 당신과 내 삶은
바퀴 닮은 둥근 성격으로
둥글게 굴러왔고
둥근 시간의 굴레 속에
구겨진 삶의 애환을
평탄하게 직선으로 펴가면서
동고동락 길이사랑으로 바쁘게 달려왔소
난 사랑의 가속 페달을 힘차게 밟았고
당신은 내조로 껴안고 보듬어
자전거 가정 여행을 해왔소
여보, 앞으론
자연을 구경하며 서행하는
자전거를 탄 풍경으로
나들이 소풍의 삶 살자구요.
(안상인·시인, 충북 옥천 출생)
+ 부부의 길
믿음이란 장미 한 송이
말라서 부서질 때까지
하염없이 늪 속을 헤매어도
덧없이 흘러준 당신이기에
검붉은 장미 되어도 난 기쁘오.
사랑이란 장미 한 송이
불길 속 정열 연기될 때까지
정처 없이 바람 속을 헤매어도
나만을 사랑한 당신이기에
벼랑 끝 죽음이 오더라도
당신을 대신하겠소.
검소란 장미 한 송이
화려함을 접고 불혹을 넘어서까지
자식을 위한 운명 속을 살았던 당신이기에
이젠 자력이 조금 풀려도
당신 뜻에 따르겠소.
살아본즉 물거품 같은 세상
무지개 빛 사랑은 아니더라도
허망한 헤어짐이 올 때까지
웃으며 살아보오.
(유일하·시인, 1960-)
+ 천생연분
구월의 싱그러운 밤을
코스모스 늘어진 중랑천
산책로를 따라
손깍지로 다정히 하나 되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아내와 함께 걸었다
이십여 분 걸었을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는
발등에 서서히 물집이 잡혔다
아내는 두툼한
등산 양발을 벗어
내 큼지막한 두 발에 신겨 주었다
한참을 걷더니 아내가 말한다.
´여보, 나도 발등이 쓰라려 오네.´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오른쪽 발등이란다.
사실 난 왼발 발등만 쓰라렸기에
냉큼 오른쪽 양말을 벗어
아내에게 신겨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켤레의 양말을
나는 왼발, 너는 오른발에 신고
상쾌한 가을 공기 속을 걸었다
천생연분!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