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6일 수요일

정현종의 ´빨간 담쟁이덩굴´ 외


<담쟁이 시 모음> 정현종의 ´빨간 담쟁이덩굴´ 외

+ 빨간 담쟁이덩굴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
석류, 사과 그리고 모든 불꽃들의
빨간 정령들이 몰려와
저렇게 물을 들이고,
세상의 모든 심장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시간의 정령, 변화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 함께 잎을 흔들며
저렇게 물을 들여놓았으니,
살 만하지 않은가, 빨간 담쟁이덩굴이여,
세상의 심장이여,
오, 나의 심장이여.
(정현종·시인, 1939-)
+ 담쟁이

날마다
조금, 조금씩
기어오르고 있다
담쟁이가.

벽을 타고
창문을 지나
올해는 처마 밑

하늘 향해
솟아 있는 종탑으로
뻘뻘뻘
기어오르고 있다.

종을 치고 싶어서.
(이혜영·아동문학가)
+ 담쟁이

준이네가 떠난
빈 집
담벼락 위로

초록 도롱뇽 한 마리가
푸른 혀를
낼름거리며
꿈틀꿈틀 올라갑니다

앞다리를
쑥쑥 뻗으며
뒷다리를
쭉쭉 뻗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빛 비늘이
출렁대며
반짝입니다.

슬금슬금
천천히
천천히

하루하루 커지던
푸른 몸이
어느새
흰 벽 하나를 다 차지했습니다.
(오지연·아동문학가, 제주도 출생)
+ 담쟁이의 편지 - 담에게

네가 없었다면
난 생각지 못했을 거야
잎을 피울 꿈을

너를 만나고 나서
난 알게 되었어
위로 오르는 길을

네가 없었다면
난 그렇게 알았을 거야
난, 넝쿨뿐인 식물인 줄

네 위에서 잎을 피우며
난 알게 되었어
내 넝쿨 안에도 하늘로 오르는
힘이 숨어 있었다는 걸
(정갑숙·아동문학가, 1963-)
+ 담쟁이덩굴

눈발이 날리는
교실 창 밖
바위벽을
감싸고 있는
푸른 실핏줄.
팔딱팔딱
맥박이 뛰고 있었구나!
바위벽이
살아 있었구나!
(손광세·시인, 1945-)
+ 생명 - 담쟁이

벽을 온통 끌어안고
그 사막에 목숨을
뿌리며 뿌리며
뻗어오르는

어둠의 바윗덩이를
끝끝까지 감싸오르며
초록의 불꽃을
손톱 밑마다에서
명멸케 하는
(백우선·시인, 전남 광양 출생)
+ 담쟁이덩굴

천애절벽을 오른다
한 치 두 치 기어오르는 자벌레
하늘 끝에 자일을 건다

다시 내려갈 수 없는 외길
바위에 붙어 잠을 잔다
포타렛지도 없는 암벽 야영

손발 끝으로 더듬는 경전經典
얼마나 더 오르면 그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늘 아슬아슬한 길

멀고 먼 면벽수행의 그 길
(임윤식·시인)
+ 담쟁이

담쟁이 벽을 오르고 있다
다홍빛 불도장
다섯 손가락
싸늘한 담벼락 위에
겨울판화처럼
얼음화석처럼
눈물로 아로새겨지도록
한 손바닥 두 손바닥
천천히 몹시 천천히
붉게 뜨겁게 벽을 오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험한
제 안의 벽을 오르고 있다
제 안의 한계를 오르고 있다
담쟁이는 알고 있는 거다
희망은 항상
벽 너머에 있다는 것을
(홍수희·시인)
+ 담쟁이

내겐 허무의 벽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지도 몰라
내겐 무모한 집착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황홀한
광기인지도 몰라
누구도 뿌리내리지 않으려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내리는 저 여자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픔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마침내 벽 하나를
몸 속에 집어넣고
온몸으로 벽을 갉아먹고 있네

아, 지독한 사랑이네
(이경임·시인, 1963-)
+ 담쟁이

온몸으로 너를 더듬어서
변변한 꽃 한번 피워내지 못했지만
상처 많은 네 가슴
내 손으로 만지면서
담장 끝
너를 보듬어 오르다 보면
그때마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것은 몰라도
몸으로 몸의 길을 열다 보면
알 길 없던 너의 마음
알 것도 같아
캄캄했던 이 세상
살고 싶기도 하다.
(손현숙·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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