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8일 일요일



<소설가 고 박완서 추모의 글>

1. 고인의 시

+ 시를 읽는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이런 사람 만났으면

보름달처럼
뭉게구름처럼
새털처럼
보기만 해도 은하수 같은 이.

풍랑으로 오셔도
바닷가 도요새 깊은 부리로
잔잔한 호수 위 빗살무늬 은물결처럼
초록의 싱그러움 잊지 않는 이.

그래서
자신의 잣대를 아는 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
잠자는 영혼 일으켜 세우며
눈빛만 마주쳐도 통하는 이.

그래서 같이
여행하고 싶은 이.
(박완서)
2. 추모의 시

+ 꽃이 된 기도 - 이해인 수녀

엄마의 미소처럼 포근한 눈꽃 속에
눈사람 되어 떠나신 우리 선생님
고향을 그리워한 선생님을
그토록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흙 속에
한 송이 꽃으로 묻고 와서 우리도 꽃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을 더 깊이 사랑하는 꽃
선생님의 인품을 더 곱게 닮고 싶은
그리움의 꽃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시어 더 든든하고 좋았던 세상에서
우리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울고 울어도 눈물이 남네요

선생님은 분명 우리 곁에 안 계신데
선생님의 향기가 눈꽃 속에 살아나
자꾸 새롭게 말을 걸어오네요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 세상을 위로하는
미소천사로 승천하신 것 같다며
이 땅의 우리는 하늘 향해 두 손 모읍니다

´갑자기 오느라 작별인사 못했어요
너무 슬퍼하면 제가 미안하죠
거기도 좋지만 여기도 좋아요
항상 기도 안에 만납시다, 우리´
선생님의 초대에 행복한 오늘
한 마음의 평온함으로 인사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우리의 어둠을 밝히는 엄마별이 되어주십시오
+ 추모 기도 - 이해인 수녀

사랑의 하느님
오늘은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깊은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참으로 많이 사랑하였고 많이 사랑받아 행복했노라고
겸손히 고백해온 우리의 어머니를 받아주십시오
흐르는 눈물이 강이 되고 녹지 않는 그리움이 얼음꽃으로 피어있는
우리 가슴 속 깊디깊은 슬픔도 헤아려 주십시오
황망히 먼 길 떠나느라 일일이 작별인사 못하여
가슴에 파랗게 멍이 들었을 우리 어머니의 마지막 침묵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더 애절하고 애틋한 봉헌기도로 받아주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느님, 늘 약자를 배려하고 손 잡아주셨던 어머니처럼
우리도 언제나 속이 깊고 마음이 넓은 애덕의 사람들이 되도록 은총 베풀어주십시오
헤어짐의 슬픔을 그저 울고 또 우는 것으로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우리의 나약함을 굽어보시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성인의 통곡 속에 더 아름답고 더 꿋꿋한 믿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셔 주십시오
우리의 감은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생명의 하느님
진실하고 따듯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한 생을 마감한 우리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근심도 고통도 없는 지복의 나라에서 편히 쉬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조금만 사랑해도 우리 마음에 고운 길을 내어 주시는 놀라움 고마움 새로움의 향연
아직도 끝나지 않을 우리의 기다림
앞으로 이어질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도의 마음이 피워내는 꽃으로 봉헌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어머니를 보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토록 행복하게 해 주셨던 어머니 고맙습니다
우리의 사랑 속에 안녕히 가십시오 어머니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선생님 ´나목´으로 서 계시지 말고 돌아오소서 - 정호승 시인

선생님
아침에 일어나 흰 꽃잎처럼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눈송이 사이로 한 송이 눈송이가 되어
선생님 떠나가셨다는 소식 너무 놀랍습니다
유난히 추운 올 겨울 혹한이 선생님껜 그토록 혹독하셨습니까
일찍이 이 시대의 ´나목´이 되어
문학의 언어로 위안과 행복의 열매를 나누어 주셨는데
이제 또 어디 가서 한 그루 ´나목´으로 서 계시려고 하십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차산 아래 뜰도 거니시고
봄이 오면 피어날 꽃 이야기도 하시고 고구마도 드시고
마더 테레사 수녀님께서 좋아하신 초콜릿도 드셨는데
선생님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심으로써 저희를 버리십니까
저랑 봄날 햇살 아래 점심 드시기로 한 약속 잊으셨습니까
가슴에 묻으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아드님 뵙고 싶어
서둘러 가셨으리라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뵙고 싶어 서둘러 가셨으리라
선생님 문학의 뿌리인 어머니 만나 뵙고 싶어 더욱 서두르셨으리라
미루어 생각해도 생각해도 눈물이 고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영원히 불혹의 작가이십니다
아직도 쓰셔야 할 소설이 흰 눈 속에 피어날 동백처럼 숨죽이고 있습니다
못 가본 길이 그토록 아름다우십니까
좀 늦게 가보시면 아니 되옵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이라고 하신 선생님 말씀
제게 힘과 위안을 주신 그 말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아, 어떠한 고통도 극복하려 들지 말고 견뎌야겠구나
가슴 깊이 새기고 열심히 노력하고 실천해왔는데
선생님께서는 또 무엇을 견디시기 위해 그토록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소복소복 눈 내리는 아침 눈길을 그토록 걸어가고 싶으셨습니까
´휘청거리는 오후´ 표지를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새색시처럼 살짝 웃으시던 그 수줍은 미소 잊혀지지 않는데
선생님
이 눈 그치면 시장 보고 오신 듯 돌아오세요
돌아오셔서 저희들에게 ´이제 한 말씀만 하소서´
선생님께서도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이제 그리움을 축복처럼 생각하겠습니다
전쟁과 분단과 이산의 아픔이 없는 천주의 나라에서 다시 쓰신 소설
열심히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국문학의 영원한 모성이신 선생님
한국소설문학의 맑고 밝은 햇빛이신 선생님
천주 품안에서 평안하소서
(정호승·시인, 1950년 대구 출생)
3. 고인의 약력과 생애

+ 약력(1931.10.20-2011.1.22)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도시의 흉년』,『목마른 계절』,『욕망의 응달』,『오만과 몽상』,『서 있는 여자』,『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미망(未忘)』,『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이 있으며, 소설집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배반의 여름』,『엄마의 말뚝』,『꽃을 찾아서』,『저문 날의 삽화』,『한 말씀만 하소서』,『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살아 있는 날의 소망』,『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한 길 사람 속』,『어른 노릇 사람 노릇』, 『두부』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생애 - 서병욱 작가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군 묵송리 박적골에서 출생. 박적골은 개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벽촌. 세 살 때 아버지는 病死(병사)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였다. 어머니, 열 살 위인 오빠와 함께 유년기는 흘렀다. 할아버지는 「아비 없는 손녀」를 끔찍이 아꼈다. 동구 밖 산모롱이에서, 출타 후 귀가길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건 큰 기쁨이었다. 그럴 때면 일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사탕이나 약과 따위를 손에 쥐어 줬다. 더러는 산모롱이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눈 내리는 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청승 좀 작작 떨라』고 했다. 그런데도 「기다리는 재미」는 알싸했다. 어머니는 처녀적에 「삼국지」 「수호지」을 읽고 그 내용을 술술 외울 정도였다. 그리고 「옥루몽」 「홍루몽」 「춘향전」심청전」 같은 소설들은 손으로 베껴 책으로 만들었다.

박완서는 지금도 기억한다. 반닫이 속에 가득했던 그런 책들을. 어머니는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불에 덴 것처럼 후닥닥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예닐곱 살 적에 이미 완서는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왠지 슬프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이내 완서도 서울로 데려 갔다.

6·25 한국전쟁 언저리. 갓 스물의 朴婉緖(박완서). 오빠의 죽음으로 늙은 어머니, 그리고 올케와 어린 조카 둘은 박완서의 몫이었다. 어머니와 올케는 허구한날, 아들과 남편을 잃은 설움에 산송장이었다. 어머니는 젊은 남자만 보면 『왜 저 사람은 살아 있냐?』 『왜, 하필 내 아들만 죽었냐?』며 애통절통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증오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인 오빠의 죽음은, 남들에겐 한갓 「지나치는 바람」일 뿐이었다.

박완서의 일상은 廢家(폐가)에서 흘렀다. 식구들이 도무지 「살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것 파먹고, 돈 될 만한 물건들을 처분해 살았다. 그러나 이내 「굶어 죽을 처지」에 이르렀다. 박완서는, 「어떻든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가 일었다. 그 의지가, 식구들에겐 다소 염치없기까지 했다. 그러나 삶은 영화가 아니다. 구세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거리를 찾아 무턱대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1951년 겨울. 대포 소리가 아직도 간간이 들리는 폐허의 도시 서울. 밤이 돼도 주택가는 어두웠다. 불을 켜는 집은 열 집에 하나가 채 안 됐다. 전쟁의 후유증은 길고도 깊었다. 너나없이 가난했다. 일거리가 어디 있나? 수없이 발품을 판 끝에 미군 PX 초상화부 점원이 됐다. 서울대 국문과를 며칠 다녔지만, 영문과 2학년 재학중이라고 이력서에 썼다. 학력 위조인데도 무덤덤했다. 죄의식 같은 게 전혀 없었다. 그만큼 산다는 게 절박했다. 당시 서울엔 그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미군 PX라는 말만 들어도 모두 사족을 못 썼다』 그러나 몇 마디 회화 테스트를 거쳐 배치된 곳은 으레 생각하던 미제 물건을 파는 매장이 아니었다. 초상화부였다. 말이 근사해 초상화부지, 실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간판쟁이 대여섯 명이 앉아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몇 푼 버는 곳이었다. 화려한 매장과는 달리 칸막이로 차단된 더럽고 우중충한 구석이었다. 박완서는 바람잡이가 됐다. 지나가는 미군을 꼬셔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는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PX 물건이야 정가대로 파는 거니까, 짧은 영어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도록 미군을 설득해야 하니, 우리말로도 어려운 걸, 그것도 그 짧은 영어로 하라니.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이왕 취직했으니 한달 월급이나 타먹고 그만두자고 맘먹었다.

박완서는, 그러나 벙어리 노릇만 하기엔 한달이 너무 길었다. 박완서는 월급제였지만 화가들은 실적제였다. 그림 그리는 분량에 따라 수당을 받았다. 처음 얼마간은, 전임자가 주문받은 그림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주문량이 바닥나자, 화가들은 박완서에게 성화를 부렸다.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했다. 박완서의 말문이 조금씩 열렸다.

자기 얼굴을 그려 달라는 미군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애인이나 아내, 어머니의 사진을 내보이고 초상화를 부탁했다. 차츰 관상도 좀 보게 됐다. 대개 졸병이고 좀 어수룩해 뵈는 미군은 꼬시기가 쉬웠다. 처음 수작은 「당신 참 핸섬하다」에서 「물론 걸 프렌드가 있겠지? 그 걸 프렌드는 얼마나 예쁠까? 보고 싶다. 사진 있으면 보여 줄래」로 이어졌다』 그 미군이 기혼자면, 걸 프렌드는 졸지에 와이프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서너 달 후, 종전 수준의 그림 주문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너머 산이다. 미군들 중 더러는, 초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반품을 해왔다.

이때 반품을 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건 박완서의 수완에 달렸다. 그럴 땐 달랑달랑하는 박완서의 짧은 영어는 혓바닥에 경련을 일으키게 했다. 반품을 받게 되면 화가들도 죽을
맛이었다. 다시 그릴 경우 재료비 등 생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은 또 받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주문이 전임자 때보다 더 늘고 반품도 크게 줄었다. 박완서의 콧대는 높아졌고, 화가들은 박완서를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박완서는 이따금 수틀리면 반품을 받았다. 그리고 반품된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쪼르르 달려가 화풀이를 했다.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어요?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보단 낫겠네요, 계속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윗사람에게 알려서 해고시키겠어요』 화가들은 대개 40-50대여서, 박완서에겐 아버지뻘이었다. 그런데도 박완서는 화가들을 「김씨」 「이씨」로 부르며 되바라지게 굴었다. 박완서 자신 때문에 화가들이 먹고산다는 자만과 짧은 영어로 종일 지껄여야 하는 스트레스를 화가들 쪽으로 돌렸다.

화가들이 「저런 못돼 먹은 계집애가 다 있을까」 하며 속으로 이를 간다는 걸 물론 알았다. 그러나, 「내가 양키들에게 당한 수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들도 한번 당해봐라」 하는 식이었다』 실제 PX 출입 때 여순경으로부터 몸검사를 받았다. 도시락까지도 검사를 받았다. 물건을 숨겨 놓지 않았나, 감시하는 거였다. 한국인은 1달러라도 소지하다 발각되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첫 월급을 타서 어머니에게 갖다 줬다. 어머니는 가방을 열고 돈뭉치를 꺼냈다. PX 포장지로 싼 봉투 안에서 돈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빳빳한, 은행에서 금세 나온 돈이었다. 사십만원이었다. 어머니는 금세 눈에 눈물이 괴었다. 『세상에, 세상에, 네가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단 말이지!』

그러던 어느 날, 한산한 오후. 덩치만 크고 어수룩해 뵈는「박씨」라고만 알고 있는 화가가 화집 1권을 가지고 와 박완서에게 보여 줬다. 박씨는 평소에도 공용의 허드레붓을 안 쓰고 자기 붓만으로 초상화를 그려, 박완서는 그렇잖아도 속으로 「꼴값하네」라며 비웃고 있었다.

「화집만 갖고 다니면 간판쟁이가 화가로 둔갑하나」라며 우습게 여겼다. 화집은 일제시대 鮮展(선전)에 입선한 작품들을 실은 것이었다. 박씨는 그중 시골여자 둘이서 절구질하는 그림을 가리키며 「자기 그림」이라고 했다. 명함만한 크기로 흑백이었다. 그 그림 밑에 박수근이라고 인쇄돼 있었다. 그제서야 「박씨」의 이름을 알았다』 박완서는 간판쟁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쇼크를 받았다. 그 동안 너무 버르장머리없이 군 게 더없이 무안했다. 박수근뿐만 아니라 PX에는 서울대 출신도, 재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청소아줌마 중에는 중학교 교사 출신도 있었다. 전쟁은 인간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박수근이 훗날 그 유명한 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면 박수근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유명화가가 될 줄 알았다면, 그만한 안목이 있었다면, 박수근의 그림 몇 점쯤은 손쉽게 얻어낼 수도 있었다. 아니 하다 못해 반품 들어온 초상화라도 몇 점 거둬 두었다면 「화가 박수근」의 그 어려운 시절의 증거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8호 정도의 초상화가 단돈 6달러, 그것도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절반도 안 돌아갔다. 겨우 목숨줄이나 이어가는 정도였다.

『박씨는 눈이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담담했다. 별 드러나지 않았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얼굴에다, 목소리는 낮았다. 재담도 할 줄 몰랐다. 사교술도 없었다. 누가 점심 먹으러 가자하면, 미적미적 따라갔지만, 먼저 바람 잡는 일은 없었다』 박수근은 가난했지만
의젓했다. 모두들 「돈, 돈, 돈」하며 한푼에 치를 떨 때도 박수근은 돈에 비교적 미적지근했다. 염색한 군 작업복을 걸치고 다녔다. 그땐 그 옷차림이 낯설지 않았다.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다.

還都(환도)로 PX는 용산으로 옮겨갔다. 박수근도 따라 갔다. 이후 박완서는 박수근을 더 이상 만난 적이 없다. PX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훗날 박수근 선생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난, 이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야 알았다. 그가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 게 너무 기뻤다. 그러나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다. 또한 절박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가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뒷날 남편이 된 호영진을 만난 곳도 PX였다. 처음엔 그도 관심권 밖이었다. 박완서 자신을 빼놓곤 다 사람으로 안볼 때였다. 그와는 안면만 있었을 뿐이다. 호영진의 집은 명륜동, 박완서의 집은 돈암동. 같은 방향이어서 더러 전차를 같이 탔다. 호영진은 다행히 박완서가 내심 무시하는 PX 종업원이 아니었다. PX가 들어 있는 동화백화점 소속 직원인 측량기사였다. 박완서는 호영진이 우선 PX종업원이 아닌 게 맘에 들었다.

『남편은 사교술은 빵점이었다. 덤덤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굴었다. 편안한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과일봉투를 들고 밤에 불쑥 우리집을 찾아온 적도 있다. 방향이 같다는 게 늘 핑계가 됐다. 명륜동에서 내린다는 걸 깜빡 잊고 돈암동까지 온 김에 들렀다는 식이었다』

1953년 초. 박완서의 올케가 드디어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냈다. 박완서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어머니에게 PX를 그만두고 결혼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1953년 4월21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결혼했다. 제대로 된 예식장도 없을 때였다. 중국집 「아서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로는 호화판이었다. 신접살림은 남편의 집-종로구 충신동 18평짜리 한옥에서 시작됐다. 1963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그 동안 딸만 넷을 줄줄이 낳았다. 원숙 원순 원경 원균이었다. 집이 너무 좁아 동대문구 신설동 한옥으로 옮겼다. 대지 55평, 건평 30평쯤이었다.

남편은 PX가 옮겨 간 뒤 그 자리에 들어선 동화백화점에서 전기상을 시작했다. 동화백화점이 삼성그룹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10년 넘게 붙박고 있었다.

1963년 아들 원태를 낳았다. 첫아들이라 집안의 기쁨은 엄청났다.

이미 찌들대로 찌든, 주부가 돼버린 박완서. 1970년, 마흔 살이었다. 그때 마침 「신동아」의 논픽션 모집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PX 근무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논픽션을 쓰기 시작했으나, 마음 같지가 않았다. 「논픽션」엔 「사실」이라야 한다는 족쇄가 따랐다.
자기 표현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바꿨다. 대학노트에 촘촘히 적었다. 이게 데뷔작 「裸木(나목)」이다. 「여성동아」 장편소설 당선작이다.

「裸木」은 11월호 여성동아 부록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그 후로도 박완서의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무거운 시장 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짬짬이 소설을 썼다. 그 이듬해. 「현대문학」에 단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가 실렸다.
이로써 묵은 소원이 이뤄졌다.

1973년, 「신동아」에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가 실렸다. 이 작품은 그 얼마 후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됐다. 박완서는 비로소 「작가」로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외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저녁의 해후」 「아저씨의 훈장」 「엄마의 말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쓴다. 이들은 한결같이 소위 「분단문제」를 다뤘으며 이를 통해 「비통한 박완서의 가족사」를 줄기차게 내비치고 있다.

『6·25 한국전쟁, 분단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로 인한 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아니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그 피로 뭔가를 써야 할 것 같다. 왜냐면, 이는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박완서는 1991년, 「저 세상으로 간 남편」에의 회한을 담은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썼다. 남편이 1988년 폐암으로 죽기 전, 남편의 마지막 1년을 간병기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매일 밤 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라도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걸 알아주길 바랐다』 소설에의 집착은 슬픔을 잊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에의 천착이기도 했다. 모티브인 여덟 개의 모자는 남편의 폐암이 뇌로 전이되면서 항암제 때문에 탈모증이 생기자 하나 둘 사모은 것이다. 간병하면서 절망하고 때론 짜증을 내면서도, 모자에 얽힌 신혼 때의 추억까지도 내비치고 있다.

1988년, 그해는 박완서에겐 「악몽」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 3개월여 후쯤, 스물다섯의 외아들 원태가 죽은 것이다. 원태는 마취과 의사가 되려고 했다. 의과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었다. 그러면서 연극에도 빠져 있었다. 연극 「세일럼의 마녀」에서 주연을 했고 「코뿔소」를
연출하기도 했다. 박완서는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묘비명을 썼다.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 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

박완서는 부산 분도수녀원에서 20여 일을 하느님과 대결하며 살았다. 그러나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였다. 남편과 아들이 살았을 땐, 「글을 쓴다는 게 사치요, 욕심이지」 싶었다. 그러나 죽은 후엔 글은 공기였다.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반사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내 기억력 말고는 아들이 존재했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이 도무지
낯설고 싫다. 그런 세상과는 생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누군가가 그런 박완서를 두고 『외롭지 않느냐』고 하면 『외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런 너는 외롭지 않느냐」고, 속으로 되물었다.

한동안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자신)」를 생각해 내니 자신이 너무 징그러웠다. 박완서의 소설은 「평범한 개인의 일상」이 타깃이다. 의도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이다. 문학은, 소설은, 큰 게 아니라 조그마한 것이 감동을 준다는 걸 선험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소설도 저잣거리에 나가 찬거리를 마련하듯, 그렇게 쓴다. 그러나 실상 「뼛속의 진까지 다 빼는 고통」이 따른다.

박완서는 언젠가 말했다.『누군가로부터 「어떻게 마흔 살에 글을 쓸 마음을 가졌느냐, 습작은 얼마나 했느냐, 누구에게 사사했는가」 등의 질문을 받을 땐 대답이 궁색하다. 사사도 한 바 없고 습작기도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으스대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누군가가 말한 「만들어진 소설가」가 아니라 「태어난 소설가」란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꼭 말하자면 「태어난 작가」 쪽이다.

어머니의 옛 얘기나, 사춘기에 섭렵한 문학작품이나, 그리고 「애통한 가족사적 슬픔과 응어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를 「소설가로 밀어 내지 않았나」 싶다. 아마 그는 쓰지 않았으면 지레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완서는 이제껏 6·25와 분단문제에 매달려 있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윤리의 붕괴 등을 보면서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여성들을 끄집어낸다. 왜곡된 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기도 한다. 「裸木」은 6·25 전쟁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사회, 황폐한 인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민족분단이라는 비판적 의식까지 담고 있다. 또한 어머니의, 여성의 존재를 통해 전쟁의 후유증을 적시하고 있다. 「裸木」의 연장선상에서 「엄마의 말뚝」은 도드라진다. 戰後(전후) 현실과 사회적 변동, 즉 물질만능주의의 세태와 속물주의적 근성을 야유한 그런 패턴은 이후 「도시의 흉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소설을 통해 확대된다. 그리고 6·25 이전의 시대적 의식의 근거로 장편소설 「미망」을 내놓는다. 「미망」을 통해 박완서의 관점은 역사로까지 접근한다. 오늘날 가치관의 붕괴는 가족 구조와 삶의 풍습이 파괴되는 데서 상당 부분 유래한다고 보고 있다.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끊임없이 꿈으로부터 배반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꾸는 이혼녀의 얘기다. 박완서는 이 소설 속에서 「인간으로 입문하는 조건을 100점으로 칠 때 남자로 태어나는 것은 50점을 따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남성우위의 사회라는 부조리가 신의 섭리에 합당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박완서. 아직도 詩 100여 편은 외우고 있다. 김수영과 김기림은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시인이다. 봄비라도 촉촉이 내려 주는 날엔 변영로의 시를 읊는다.

박완서는 말수가 적다. 새침데기다. 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지 못한다. 이따금씩 전철에서 만난 知己(지기)와 수작을 떠는 게 싫어 내릴 역을 몇 정거장 앞두고 슬그머니 내린 적도 없지 않다.

『소설은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소설을 매개로 작가와 독자가 서로 위로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소설에서 「재미」는 「맛」이다. 맛이 혀에 달기만 하고 뒤끝이 나쁜 것과 달기도 하고
뒤끝이 좋은 것이 있다. 달기도 하고 뒤끝도 좋은 것이 「좋은 소설」일 것이다. 독자들에게
「헛된 꿈」과 「삶을 너무 쉽게 보게 하는 것」은 「나쁜 소설」일 것이다』

『「소설가」란 신분증은 없어도, 「나는 소설가」란 자각 하나로 살아 왔다. 난, 아직도 소설의 정의를 못 내리고 있다. 다만 「소설은 얘기다」 정도로만 여긴다. 어머니처럼 「뛰어난 얘기꾼」이고 싶다』

박완서는 자신의 16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나 내 열여섯살 추억이 부끄러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 거리에는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거래하는 노점상들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에 책도 많았다. 오빠가 나를 위해 38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었다. 그건 내가 꿈에 그리던 책이었다. 얄팍한 일본의 연애소설 나부랑이나 빌려 보면서 그게 문학인줄 안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세계문학의 거대한 봉우리에 압도당하여 잠 못 이루던 나의 16세야말로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을까?˝

작가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자전적 소설 `엄마의 말뚝·2´에서 오빠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해방 뒤 한때 좌익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오빠는 삼팔선을 넘어 물밀듯이 남진해온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이웃의 고발로 끌려가서는 의용군으로 입대한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9·28 수복에 이어 다시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한 1·4 후퇴가 시작될 즈음 육신과 정신이 다같이 망가진 오빠가 돌아왔다. 시민증이 없는 오빠 때문에 남들의 피난대열에 합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민군의 재입성을 앉아서 기다릴 수만도 없던 일가는 예전에 살던 현저동 산꼭대기의 한 집을 피난처로 정해 틀어박혔으나, 오빠는 결국 인민군에게 발각돼 죽임을 당한다.

명민하고 헌칠하여 어릴 적 영웅이었던 오빠를 앗아간 전쟁의 악의(惡意)라는 모티브는 박완서 소설의 가장 커다란 화두가 됐다.

2000년 10월 어느 대담에서 박완서는 ˝누가 나에게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 하나를
말해보라면 통일이라고 해야 할 것처럼 느끼다가도 통일을 위해 넘어야 할 내 안의 무수한 산을 생각하면 내 생전에 차라리 통일을 안 보고 싶어집니다. 내 안의 무수한 산이란 기억이며 원망이지요.˝라고 밝힌 바 있다.

˝내가 꿈꾸는 자유는 편가르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내 말이나 내 생각이 어떤 특정 색깔로 지목되어 환영받거나 비난받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왼쪽 아니면 오른쪽,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편을 갈라 끌어안거나 따돌리는 세태를 보면 아직도 아물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흔만 같아 넌더리도 나고 서글프기도 해요. 그래서 사람은 둘로 분류할 수 있는,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자꾸자꾸 말하고 싶었나 봐요.˝

소설 또는 소설가에 대한 박완서의 생각을 아래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도 용훼(容喙)할 수 없는 완벽한 정의를 하나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내가 소설을 쓰고 나서 훨씬 후였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썼다는 얘기가 된다.

소설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소설가 소리 먼저 듣게 돼 버린 허술함 때문인지 나는 그런 정의를 무슨 신분증처럼 지님으로써 마음을 놓고 싶었던 것 같다. 행여 누가 내가 소설가인지 아닌지 시험하려 들거나,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하려는 눈치만 보이면 여봐란 듯이 꺼내보이기 위한 거였기 때문에 그 정의는 권위 있고 엄숙한 것일수록 좋았다.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쓰고 본 주제에 내가 소설가라는 게 그렇게 소중하고 대견스러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중에서도 뛰어난 소설가야 물론 우러러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소설가 외의 딴 직업이나 신분은 아무리 높아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다.

아직도 비록 신분증은 못 얻어 가졌지만 ˝나는 소설가다.˝라는 자각 하나로 제아무리 강한 세도가나 내로라 하는 잘난 사람 앞에서도 힘 안들이고 기죽을 거 없이 당당할 수 있고,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밑바닥 못난이들하고 어울려도 내가 한 치도 더 잘난 거 없으니 이 아니 유쾌한가.

소설에 대한 엄숙한 정의를 하나 얻어 가지고 싶어 조바심할 무렵 비로소 남들은 소설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가에 솔깃하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해한 문학론 같은 것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옳은 소리 같았다. 하다못해 소설은 마땅히 이런 거여야 한다, 아니다 마땅히 저런 거여야 한다고 싸우는 소리에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지조 없게도 양쪽이 다 옳은 소리 같았다. 그리고 곧 그런 일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소설에 엄숙한 정의를 내리지 못해 조바심하던 시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세 식구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이야기를 졸랐었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이야기의 효능까지도 무궁무진한 길로 믿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심심해할 때뿐 아니라,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할 때도, 남과 같이 고운 옷을 입고 싶어할 때도, 약아 빠진 서울 아이들한테 놀림받아 자존심이 다쳤을 때도, 고향 친구가 그리워 외로움을 탈 때도, 시험점수를 못 받아 기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망찰하셨을 뿐, 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 드셨다.

어머니가 당신 이야기의 효능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이야기밖에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딸의 모든 상처에 그것을 만병통치약처럼 들이댈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어머니는 때때로 낮은 한숨을 쉬시면서 이렇게 조바심하였다.

˝이야기를 너무 바치면 가난하게 산다는데.˝

그건 이야기를 즐겨 만드는 사람, 즐겨 듣는 사람, 쌍방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얼마나 그럴싸한 예언인가.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걸겠다.〕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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