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4일 일요일

정일근의 ´사는 맛´ 외


<인생 묵상 시 모음> 정일근의 ´사는 맛´ 외

+ 사는 맛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 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의 맛을 들이다 고수가 되면
치사량의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정일근·시인, 1958-)
+ 인생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이기철·시인, 1943-)
+ 자연인

산같이 감싸는 마음으로 살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으로 살고
들판의 포근한 마음같이 살고
이렇게 살아가렵니다
사는 날에 있어서 나는 자연입니다
(임남규·시인, 1964-)
+ 굴비

분명 비린내에도 품계는 있다
내 살점 뜯으며 생각하라
살아서 비굴(卑屈)하겠느냐
죽어서 굴비(屈卑)하겠느냐
(복효근·시인, 1962-)
+ 살아간다는 말

날벌레 걸려들기를 종일
기다리는 저 거미에게도
짹짹 보채는 새끼들에게
벌레 먹여주는 새에게도

다른 삶의 끈 끊고서야
제 생명 겨우 이어가는
먹고산다는 말 안쓰럽다
살아간다는 말 쓸쓸하다
(강인호·시인)
+ 본연의 삶

좋은 詩엔 동서고금이 없다. 맑고 찬 샘물 맛과 같다.
옛날 중국에서 두보가 목말라 마셨던 샘물 맛과
오늘날 이 땅에서 내가 목말라 마시는 샘물 맛은 다르지 않다.
두보의 詩가 여전히 새로운 건, 본연의 삶으로 일관했기 때문.
(박희진·시인, 1931-)
+ 누런 똥 - 평사리에서

풋고추 열무쌈 불땀나게 먹고
누런 똥 싼다
돌각담 틈새 비집고 들어온 바람
애호박 꽃망울 흔드는데
이쁘구나 힘주어 누런 똥 싸다보면
해지는 섬진강 보인다
사는 일 바라거니 이만 같거라
땀나고 꽃피고 새 거름 되거라.
(곽재구·시인, 1954-)
+ 사는 법

살다가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멈춰 선 채
달리 사는 법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노라면
그 길을 가던 사람들도 더러는
길을 멈춰 선 채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기도 하더라
마음은 그리 하더라.
(홍관희·시인, 1959-)
+ 무엇을 쓸까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 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오세영·시인, 1942-)
+ 인생은 그런 거더라

이 세상 살다 보면
어려운 일 참 많더라
하지만 알고 보면
어려운 것 아니더라
울고 왔던 두 주먹을
빈손으로 펴고 가는
가위 바위 보 게임이더라

인생은 어느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거더라
내가 홀로 가야할 길
인연의 강 흘러가는
알 수 없는 시간이더라
쉽지만 알 수 없는
인생은 그런 거더라
(김종구·시인, 1957-)
+ 어떤 일을 하십니까?

어떤 사업가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어떤 일을 하십니까?˝
˝아버지입니다.˝

˝아니, 하시는 일이 뭐냐고요?˝
대답은 똑같았다.
˝아버지입니다.˝

상대방은 다시 물었다.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시는 군요.
어떤 일을 해서 생계를 꾸리시느냐고
물은 겁니다.˝

˝본래 하는 일은 아버지 역할입니다.
하지만 날아오는 청구서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브라이언 카바노프)
+ 삶에 관한 물음

어떤 이는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골에 들어가 산새들의 울음소리나 듣고
산나물이나 씹으며 조용히 살라고 한다

어떤 이는
호숫가 풍치 좋은 곳을 찾아 정자를 세우고
낚싯대나 드리우고 시나 읊조리며 한가하게 살라고 한다

어떤 이는
거친 세상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세상의 달고 쓴 맛들을 다 맛보며 살라고 한다

어떤 스승은
능력이 소중하니 배우고 익혀 힘을 기르라고도 하고
어떤 친구는
재산이 소중하니 많은 돈을 모으며 살라고도 하고
어떤 선배는
사람이 중요하니 좋은 이웃들을 많이 만들라고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묻고 다니다
어느덧
한평생 다 보내고 말았다
(임보·시인, 1940-)
+ 부지깽이 전언(傳言)

아궁이에 군불 지펴보면 안다
불길과 연기가 내통하는 길 있다는 것을
참나무 장작 꾸역꾸역 밀어 넣어보면 안다
구들장 아래 방고래로 불길 지나기 위해서
때때로 바닥에 엎드려 눈물 쏟아야 한다는 것을

방 아랫목 싸늘해진 새벽녘 깨어나
캄캄한 아궁이 들여다본다
산다는 것, 이렇게 검게 속 태우는 일이거나
불구덩이 뛰어들었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이라며
산더미처럼 쌓인 재 푹푹 퍼 담는다
(장하빈·시인, 1957-)
+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곤한 낮잠에서 깨어
창문을 여니
태양이 서산을 넘는다

잠깐이었건만
세상은 어느새
어둑한 저녁을 맞고 있다

인생도 그러한가
한눈 판 동안
세월은 저만치 물러앉았으니

문득 문득
터잡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 패는 한숨소리 커져 가고

찰나를 살면서도
영원을 노래하는 속절없음에
낯빛만 석양처럼 붉다
(김순천·시인)
+ 인생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눈물 같은 소주를 마시며
잠시 슬픔과 벗할지언정

긴 한숨은
토하지 않기로 하자

아롱아롱 꽃잎 지고서도
참 의연한 모습의

저 나무들의 잎새들처럼
푸른빛 마음으로 살기로 하자

세월은
훠이훠이 잘도 흘러

저 잎새들도
머잖아 낙엽인 것을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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