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일 일요일
<정연복 시인의 나무 시 모음>
+ 나무
몇 백 년을 살면서도
단 한번도 편히
눕지 않는다
외다리 하나로
온몸 버티어
한평생 꼿꼿이 서 있다
고단한 긴 세월을
마감하는 최후의 순간에만
고요히 누울 뿐
단 한 차례도
무릎을 꺾지 않는다
슬픔마저
푸른 웃음으로 감춘
오!
저 눈부신 직립의 생애
+ 나무
아름드리 나무이든
몸집이 작은 나무이든
나무는 무엇 하나
움켜쥐지 않는다
바람과 비와 이슬
햇살과 별빛과 달빛
온몸으로
포옹했다가도
찰나에 작별하는
비움의 미학으로 산다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굳게 지키면 그뿐
눈부신 꽃과 잎새들도
때가 되면 모두 떠나보내
한평생
비만증을 모르고
늘 여린 듯 굳건한
생명의 모습이다
+ 나무
속상한 일이 있어
마음 괴로울 때면
나무 그늘 밑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 헤아릴 수 없는
잎새들처럼
이 가슴속 쌓인
수많은 사연들
하나 둘 셋....
나무에게 이야기하면
나뭇잎들은 일제히
귀를 쫑긋 세운다
어느새 내 마음도
푸른 잎새가 된다
+ 나무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은
제각기
하나의 깃발이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하늘 향해 곧추선
저 당당한 몸짓
동구 밖
키다리 미루나무도
날씬한 은행나무도
요조숙녀 목련도
세상 모든
나무들의 이파리는
저마다
하나의 함성이다
깊이에서 높이로
뿌리에서 가지로, 하늘로 용솟음치는
거침없는 생명의
뜨거운 아우성이다
+ 나무
나무들은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는다
나무들은 한 평도 안 되는
제 땅에 붙박이로 서 있다
푸른 잎새를 내고
쓸쓸히 낙엽 지면 그뿐
나무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도
나무들은 세상 모든 이들의
다정한 벗이다
세상의 배경이 되어 주는 것으로도
하늘 우러러 부끄러움 하나 없을
나무여!
+ 나무
긴 한평생
입 한 번 뻥긋 않는다
바람의 보드라운 애무에도
잠잠하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도
낮게 신음 소리를 낼 뿐
재잘재잘
불평하지 않는다
잎새들마다
귀를 쫑긋 세워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제 몸에 담는다
나무여!
+ 나무
발이 없어
그리운 님 지척에 두고서도
찾아가지도 못한다
실바람만 불어도
파란 귀들을 쫑긋 세워
연인의 안부를 궁금해할 뿐
한평생
사랑한단 말 한마디
허투루 내뱉지 않는다
가슴속 차곡차곡
쌓이는 그리움이야
세월 속에 쉬엄쉬엄
푹 익혀
서슬 푸른
연정(戀情)으로 토하는
저 견고한 붙박이
고독한 사랑의 전사(戰士)여
+ 은행나무
어제는 밝은 햇살 아래
무심한 듯 졸린 듯
잔잔하던
저 푸른 잎새들
오늘은 보슬보슬
봄비 속에
온몸 살랑대고 있네
춤추고 있네
겨우내 참았던 그리움이
꽃비 맞아 불현듯 잠 깨었을까
마음속 가득 짙푸른 그리움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 동안의 안부를 묻는 듯
짧은 팔 한껏 뻗어
서로에게 가까이 가려고
안달이 난
지척인 듯 머나먼 듯
마주보고 서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
+ 나무의 생애
비바람 드센 날이면
온몸 치떨면서도
나지막이 작은 신음소리뿐
생의 아픔과 시련이야
남몰래 제 몸 속에
나이테로 새기며
칠흑어둠 속이나
희뿌연 가로등 아래에서도
고요히 잠자는 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목숨의 중심처럼 지키면 그뿐
세상에 반듯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서도
햇살과 바람과 이슬의
하늘 은총 철석같이 믿어
수많은 푸른 잎새들의
자식을 펑펑 낳는다
제 몸은 비쩍 마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것들과
늦가을 찬바람에 생이별하면서도
새 생명의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제가 한세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 나목(裸木)
봄, 여름, 가을
잎새들 무성한
찬란한 세 계절에는
스치는 바람에도 뒤척이며
몸살을 앓더니
겨울의 문턱에서
그리도 빛나던 잎새들
털어 내고서는
생명의 기둥으로
우뚝 서 있는 너
떨칠 것 미련 없이 떨치고
이제 생명의 본질만 남아
칼바람에도 미동(微動) 없이
의연한 모습의
오! 너의 거룩한 생애
* 정연복(鄭然福) : 1957년 서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