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신동엽의 ´좋은 언어´ 외


<말 시모음> 신동엽의 ´좋은 언어´ 외

+ 좋은 언어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신동엽·시인, 1930-1969)
+ 모오리돌

결국엔
마침표 하나였구나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줄여야겠다
(박정원·시인, 충남 금산 출생)
* 모오리돌: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돌.
+ 인간의 말에는

모여서 피는 꽃들
더불어 자라는 나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삽니다.
비가 오면 비 이야기
바람 불면 바람 이야기
날이 새면 오늘 이야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언젠가 한번은 그게 궁금해서
그들의 말을 엿듣다가
그만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들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을지 모른다는
그런 느낌이 든 거예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인간이 주고받는 말에는
(물론 진실도 담겨 있지만)
거짓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에.
(김형영·시인, 1945-)
+ 말

세상에 발언 아닌 것은 없다
말만 말이 아니라 침묵도 말이다

인간만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들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지저귀는 새는 말할 것도 없고
보라, 잎이며 꽃이며
얼마나 열렬한 몸짓들로 말을 하는가

아니, 떠가는 구름,
구르지 않는 돌일지라도
말이 없다고 이르지 말라

다만
우리의 귀가 너무 둔해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뿐….
(임보·시인, 1940-)
+ 얼룩

아침에 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옷에 얼룩이 묻어 있다
즐거운 식사시간에도
국물은 떨어져
무릎에 얼룩을 남긴다
아내가 새로 깐 식탁보에도
내 몸의 흉터자국처럼
얼룩이 남는다
사람들과 말을 할 때에도
말들이 흙탕물로 튀어
마음의 얼룩으로 남는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룩을 남겼을까
길거리에서
만원버스에서
무심코 내가 떨어뜨린 콧물처럼 남겼을 얼룩들
꽃에 사뿐히 앉았다 날아간
나비처럼
얼룩을 안 남길 수는 진정 없는 것일까
(이준관·시인)
+ 장미 가시

말에도 가시가 있다
릴케를 죽인 장미 가시가 말의 가시다
그가 쓴 말테의 수기 두이노의 비가
오르테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도 가시 투성이다
그의 글을 읽다 찔려 오래 고생한 적도 있다

말은 탱자나무 아카시아 가시오가피나무 두릅 가시연꽃
가시가 있는 모든 식물의 군락이다
말을 통과해 온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말의 가시를 피하다 어떤 사람은 먼길을 돌아서 간다

때로는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말이 입안에 있기 때문에 말이 괴로운 날이 창 밖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에 치명상을 입기도 한다
너를 미워한다는 말에 복수를 다짐하기도 한다

말은 식물성 꿈을 꾼다 모든 가시를 죽이고 묵시의 계절 속으로 떠나거나
짙은 그늘을 짠다
그늘에 와 잠드는 어린 짐승
달아오른 내 이마
설탕처럼 녹아드는 밤을 건너온 지친 새들

소문으로 생사람 잡고 싶을 땐 가시에 독만 살짝 바르면 된다
그러나 조심하라
말은 무성한 것 같으면서도 아주 헐벗은 짐승이다
감쪽같이 한번 말을 소매치기해 보라
그 안엔 당신이 한 말들이 상처처럼 열려 있을 것이다
릴케를 찌른 장미 가시도
소스라치며 놀란 말의 가시
(김왕노·시인, 1957-)
+ 4월의 일기

말문을 그만 닫으라고
하느님께서 병을 주셨다

몇 차례 황사가 지나가고
꽃들은 다투어 피었다 졌다
며칠을 눈으로 듣고
귀로 말하는 동안
나무 속에도 한 영혼이 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허공에 가지를 뻗고
파란 잎을 내미는 일
꽃을 피우고
심지어 제 머리 위에 둥지 하나
새로 허락하는 일까지
혼자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파란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주먹만큼 빛나는 새 한 마리가
잠시 머물고 간 뒤
사월의 나무들은 일제히 강물 흘러가는
소리를 뿜어내고 있다

말문을 닫으라고
하느님이 내린 병을 앓고 있는 동안
(나호열·시인, 1953-)
+ 받아쓰기

내가 아무리 받아쓰기를 잘 해도
그것은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
백일홍을 받아쓴다고
백일홍꽃을 다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받아쓴다고
사랑을 모두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받아쓴다는 것은
말을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일 뿐,
나는 말의 참뜻을 받아쓰지 못한다
나무며 풀, 꽃들이 받아쓰는 햇빛의 말
각각 다르게 받아써도
저마다 똑같은 말만 받아쓰고 있다
만일,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불러주고
아이들이 각각 다른 말을 받아쓴다면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햇빛의 참말을 받아쓰는 나무며 풀, 꽃들을 보며
나이 오십에 나도 받아쓰기 공부를 다시 한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말 말고
받침 하나 넣고 빼는 말 말고
모과나무가 받아 쓴 모과 향처럼
살구나무가 받아 쓴 살구 맛처럼
그런 말을 배워 받아쓰고 싶다
(임영석·시인, 1961-)
+ 진실로 좋다

노을에 물든 서쪽을 보다 든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요즘 들어 든다는 말이
진실로 좋다 진실한 사람이 좋은 것처럼
좋다 눈으로 든다는 말보다 마음으로
든다는 말이 좋고 단풍 든다는 말이
시퍼런 진실이란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노을에 물든 것처럼 좋다

오래 된 나무를 보다 진실이란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요즘 들어 진실이란
말이 진실로 좋다 정이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진실을 안다는 말보다 진실하게
산다는 말이 좋고 절망해봐야 진실한 삶을
안다는 말이 산에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나무 그늘에 든 것처럼 좋다

나는 세상에 든 것이 좋아
진실을 무릎 위에 길게 뉘였다
(천양희·시인, 1942-)
+ 향기로운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역겨운 냄새가 아닌
향기로운 말로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말들이
이웃의 가슴에 꽂히는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는
험담과 헛된 소문을 실어나르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말을 하게 하소서

나보다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 포기의 난초를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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