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김귀녀의 ´발바닥이 전해주는 말´ 외


<발바닥에 관한 시 모음>

김귀녀의 ´발바닥이 전해주는 말´ 외
+ 발바닥이 전해주는 말

산불로 폐허가 된 곳
돋아나는 고사리 꺾으며
축축하게 흐르는 땀
개울물에 발을 담그니
뼛속까지 깨달음이 새롭다
태초에 하나님 인간을 만드실 때
두 발로 걸으라고
튼튼하게 만들어 주셨는데
그 뜻 거역하고
자동차만 타고 다니니
이곳저곳 아픈 곳만 늘어난다
이제라도 그분의 뜻 따라
산새들과 들짐승처럼 뛰어다닐 때
지천명의 언덕을 훌쩍 넘을 것이라고
발바닥이 귓속말로 전해 주고 있다
(김귀녀·시인, 1947-)
+ 아내의 맨발 - 갑골문甲骨文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송수권·시인, 1940-)
+ 시인의 발바닥

목욕탕엘 갔다
굴참나무처럼 갈라진 내 발바닥을 보고
시인의 발바닥이 그 모양이냐고
누군가 말을 했다

유심히 보니
산도적의 발바닥
도망 나온 발바닥

어디를 쏴 다녔기에?

한쪽에 등 돌리고 앉아
발바닥을 문지른다
(김상현·시인, 1947-) 
+ 내 나이 마흔 넷의 발바닥

내 발바닥 꺼칠꺼칠한 게
어쩌면 낙타가 사막을 쉬임없이 걸어온 것처럼
물 한 방울 스밀 데 없어라
그처럼 하늘은 매냥
모래바람만 불어온 듯도 하거니와
갈 길 먼 낙타처럼 가다가
쉬어갈 때도 있거니 하면서
이제는 옆이나 뒤로 눈 돌릴 게 아니라
무작정 앞을 보며 걸어가는 것도
상책이려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서지월·시인, 1956-)
+ 발바닥아

발바닥아,
티눈 박여 못 쓰게 된 발바닥아,

오늘같이 할 일 없는 날은
때묻은 신발 하이타이 비누로 바래어 신고
아침 이슬 채이며
우북히 자라난 우리들 꿈의 옛 자취
보리밭머리 보리 팬 거나 보러 가지.
보리밭머리
깜부기로 입에 먹칠을 하고
그린 듯이 서 있으러나 가지.

발바닥아, 발바닥아,
매맞고 쫓겨나 갈 데 없는 발바닥아,

자운영 꽃핀 논두렁길로
구름 마중 우리 둘이 신나게
달려나 가지.
(나태주·시인, 1945-)
+ 발바닥에게

발바닥으로 사는 그대 보고 싶다
자신을 억누르며 인내하는 바닥으로 사는
낮은 그대가 오늘은 보고 싶다
낮은 그대 낮은 생각 속으로
아침 창문이 열리면 슬픔처럼
가늘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낮은 풀잎 뿌리를 적시고
그대 젖은 발자국 남기면서 걸어간다

땅과 가까이 온몸으로 물이 흐를 때
먼저 젖고 마는 그대 하얀 발가락
그대를 데리고 멀리 가고 싶다
그러나 오늘은 처참하게 비 내리고
수목들 뿌리가 젖는 것처럼
더욱 낮은 곳에서 떨고 있는 그대
오늘은 보고 싶다
(강영환·시인, 1951-)
+ 발바닥으로 읽다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낸다
고무통 수북히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두 발로 더듬는다
삶에 찌든 내가 밟힌다
먼 기억 속 부드러운 섬모의 숲을 거슬러 오르자
작은 파문 일렁인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행간
지난 날 부끄런 얼굴, 밟히며 밟히며
자백을 한다
좀체 읽히지 않던 젖은 문장들
발로 꾹꾹 짚어가며
또박또박 나를 읽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모란꽃 젖은 물기를 털어 낸다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꽃을 읽고 날아간다
(조경희·시인, 충북 음성 출생)
+ 발바닥

누워있는 아내 발바닥이
절여놓은 총각무 같다
온종일 버무려지던 열기 속에서
뒤죽박죽 얼마나 숨가빴을까

걷는 게 별것이 아니라는 듯
붉었다가,
희어지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듯
내보이는 희끄무레한 바닥

내 족보 속에 온갖 피톨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길을 가자는데
신경통처럼 기울어지는 세간붙이를
희락 붉으락한 발바닥으로
다잡고 가라는데

더듬어보는 뒤꿈치에
뭉툭한 독기
이 모진 기운이 아내를
똑바로 서게 하였구나
때때로 귀찮아지는 체중을
받치게 하였구나.
(정건우·시인, 강원도 양구 출생)
+ 발가락

양말과
신발 속에서
보낸 긴 하루

집에 와
양말을 벗으니
아, 예쁜 발가락 가족

어루만지고 싶을 만큼
저절로 정이 든다.

담담한 신발 속에서도
지치지 않기 위해
서로들 껴안고 지냈나 보다.

하얀 발가락들의
어깨가 좁다.
(권영상·아동문학가, 1953-)
+ 발가락

꼼질거리는 발가락이 오늘도 맨 아래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다.
단 한번도 호사를 모르는 발가락은
내가 가라면 가고
내가 오라면 오는
순종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처음부터 태어났던 모양이다.

오늘도 이유를 모르는 뜀박질을 하는 발가락은
온통 땀이 흥건하다.
온통 악취가 흥건하다.
길바닥은 혼탁한 매연에 숨쉬기가 버겁고
무심히 버려진 양심들이 겹겹이 쌓여
두 눈으로는 참아 건너지 못할 곳을
묵묵히 걷고 있다.

처음 누워있는 나를 일으키더니
이제는 앞을 향해 가라한다
이제는 앞을 향해 뛰라한다
그렇게
무언의 든든한 후원자는 오늘도
최후의 밑바닥에서 열심히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
(김노인·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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