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만리길 나서는 날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맡기며 마음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물위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 웃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 보다도
˝아니,˝ 하고 머리 흔들 그 흔한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천년 사월 육일
밤 여덟시 오십칠분
무정재에서 탈고
뜰 앞 목련 봉오리 터질 때 -함석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