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 관한 시 모음> 서정홍 시인의 ´할머니의 겨울´ 외
+ 할머니의 겨울
보일러 기름통에
석유만 가득 차면
배가 부르다는 우리 할머니
시집간 손녀가
기름통에 석유 가득 채워주고 간 날부터
다음해 겨울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착한 손녀가
기름통 가득 채워주고 갔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참지 못하는
우리 할머니의 겨울은 참 따뜻하다.
일찍 부모 잃은 어린 손자 손녀들 돌보며
내가 자식 잡아먹은 직일년이라고 울면서도
살림살이 어느 한 군데도
흐트러지지 않고 야무지게 사시는
우리 할머니의 겨울은 참 따뜻하다
가득 찬
기름통 하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정홍·시인, 1958-)
+ 할머니는 바늘구멍으로
할머니가 들여다보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잖는데
할머니 눈에는 다 보이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실끝을 곧게 세우고는
바늘에 소리를 다는
할머니 손
밤에 보는 할머니의 손은 희다.
낮보다도 밝다.
할머니가 듣고 있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소문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잖는데
할머니 귀에는 다 들리나 보다.
(윤수천·아동문학가, 1942-)
+ 시간의 탑
할머니,
세월이 흘러
어디로
훌쩍 가버렸는지 모른다 하셨지요?
차곡차곡
쌓여서
이모도 되고
고모도 되고
작은엄마도 되고
차곡차곡
쌓여서
엄마도 되고
며느리도 되고
외할머니도 되었잖아요.
우리 곁에
주춧돌처럼 앉아 계신
할머니가 그 시간의 탑이지요.
(유미희·아동문학가)
+ ㄱ자
할머니 허리가 자꾸 굽어지더니
마침내 ㄱ자가 되었습니다
할머니 귀도 허리 굽혀
손주의
웃음소리를 가까이서 봅니다.
손주의
울음소리를 가까이서 업어 줍니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할머니 입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 넣어 주실 때마다
할머니도
아-
아-
입을 크게 벌리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오물오물 거릴 때마다
할머니도
내 동생을 따라
입을 우물우물 하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윤동재·아동문학가)
+ 우리 할머니
자나깨나 할머니는
성경책만 읽으신다.
감자밭 감자 캐듯
책 이랑을 더듬으며
굵다란
감자알 같은
굵은 말씀 캐내신다.
가다가는 한번씩
그 이랑 되돌아가
이삭 감자 주어내듯
놓친 말씀 다시 줍고
마음의
광주리 찬 듯
눈을 지긋 감으신다.
(서재환·아동문학가, 1961-)
+ 할머니와 나
우물의 깊이를 보며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수돗물의 속도를 만지며
삽니다 나는.
고무신 신고 땅의 감촉을 느끼며
산과 들을 걸었습니다 할머니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들판을
건너다보며 삽니다 나는.
내가 못 보고 느낀
우물의 깊이와 땅의 감촉을
할머니와 나 사이에서
가르쳐줍니다 어머니는
(배정순·아동문학가)
+ 외할머니
맛이 간 백설기를
내가 버리려 하자
할머니는 그걸
찬물에 넣고 오물락거렸다.
몇 번을 물을 바꿔가며 그렇게 하자
백설기는 풀어져
이제 떡가루가 되었다.
할머니는
점심 대신 그 떡가루를 먹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임길택·시인, 1952-1997)
+ 폐지 줍는 할머니
등 굽은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간다.
리어카에 쌓인
폐지 더미
산봉우리처럼 솟았다.
산을 끌고 가는
할머니 굽은 등은
또 다른 산
끙끙, 작은 산이
큰 산을 끌고 간다.
(박방희·아동문학가, 1946-)
+ 우리들의 기도
아빠의 어머니는
날마다 날마다
하느님께 기도하지요
우리들이 바위처럼 살 수 있도록
엄마의 어머니는
날마다 날마다
부처님께 기도하지요
우리들이 꽃처럼 살 수 있도록
우리들은
일주일마다
할머니 댁에 가지요
할머니는
그게 바로
우리들의 기도래요.
(서금복·아동문학가)
+ 외로운 할머니
˝하룻밤만 더 묵어 가거라.˝
˝서울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할머니 눈 속에 핑 도는 눈물.
앞서가는 손자의 뒤통수가
꼭 제 아범 같다며
눈물을 꼭꼭 깨무신다.
˝언제 또 오겠냐?˝
˝설 때나 오겠어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손을 흔드는
손자의 귀여운 손바닥이
할머니 눈 속에
안개를 피우고
차는 떠났다.
할머니 곁에 남은
서리 맞은 코스모스
고개만 살래살래.
(임교순·아동문학가)
+ 감자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야,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물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할머니는 무슨 재주일까?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 저녁 할머니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머리가 허연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내 주신 감자는,
구워도 먹고 쪄도 먹고
간장에 조려
두고두고 밥반찬으로 하기로 했다.
(장만영·시인, 1914-1975)
+ 오래 살아야 할 이유
시골 할머니 집에서
딩동딩동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아빠 혼자서 들 수 없을 만큼
큰 종이 상자에 가득
김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빠는 엄마에게
당장 밥을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습니다
우리 식구는 할머니가 보내 온
김치 하나만 가지고
이른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빠는
따르릉따르릉 시골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빠는 할머니에게
철부지 소년처럼 재잘재잘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담근 김치 말고는 맛없어 못 먹는다고
김치 때문에라도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아빠의 눈시울은
시골집 감나무의 홍시처럼 붉어졌습니다
한두 달이 지나면
김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택배가
우리 집에 또 도착할 것입니다
(김용삼·아동문학가, 1966-)
+ 종근이 할머니
여든한 살
종근이 할머니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셔요?
왜, 가고야 싶지
그러나 이젠
혼자서 아무 데도 못 가
어지러워
아드님 따라
탄광 오신 지
열네 해
그 아드님
떨어지는 돌에 머리를 맞고
정신병원 들어간 지 이년
며느리가 대신 탄광일 나가
돈을 버는데
연탄도 갈고
개밥도 끓이시고
종근이 양말짝도 빨아주다
밤이면 끙끙 앓으시는 할머니
밭 매시던 때가
가장 그립다 하신다
(임길택·시인, 1952-1997)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신경림·시인, 1936-)
+ 할머니와 어머니
- 나의 보수주의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등 뒤에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소리 숭숭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나는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을 듯이 가벼웠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잘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사랑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십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조심조심 길조심˝ 성가시게 한다
(문정희·시인, 1947-)
+ 석노마(石老馬) 할머니
외할머니께서 83세의 일기로
내 곁을 떠나신 지
어느새 만 11년이 되었다.
시집온 지 겨우 몇 년만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달랑 외동딸 하나 키우시며
긴 세월 많이 외로우셨을 할머니
평생을 하루도 빠짐 없이
우리 위해 밥 짓고 빨래 하시느라
늘 고단하셨던 할머니
그냥은 써서 못 마시겠다며
설탕 한 숟가락 넣은
막걸리 한 사발을 놓고서도
몇 번이고 쉬엄쉬엄 나눠 드시던
나의 외할머니
1991년 1월 17일 저녁
할머니가 현관 밖 차디찬 계단에
쓰러져 계신 것을
나의 아내가 발견하였을 때도,
할머니는 마당에 넣어 두셨던
하얀 광목 한 보따리를
가녀리게 야윈 품에
보석처럼 끌어안고 계셨지
세상을 하직하시던 그 날도
우리 위해 저녁밥을 지으셨지
단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시지 못한 채
싸늘한 육신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할머니가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는 게
나 도무지 느껴지지 않아
할머니가 늘 주무시던 그 자리에
나 밤마다 이부자리를 펴 드렸었네
돌(石)처럼 한평생 변함없이
우리를 기르시고 보살펴 주셨던 할머니
고단한 살림살이를 지탱하시느라
늙은 말(老馬)처럼 야위셨던
당신의 그 모습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성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말없이 머물다 가신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할머니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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