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도종환의 시 ´담쟁이´ 외


<담쟁이에 관한 시 모음> 도종환의 시 ´담쟁이´ 외
+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시인, 1954-)
+ 담쟁이

담쟁이는 벽을 평지로 알고 산다
담쟁이는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평지 끝 절망의 벼랑과 만난다
벽을 놓지 못한 채
제 한 몸 던져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담쟁이의 벽
하늘에 목숨을 맡긴 채
평지 끝 절망의 벼랑에서
고공투쟁하는
벼랑 끝 절망이
담쟁이의 희망이다
(강상기·시인, 1946-)
+ 담쟁이덩굴

비좁은 담벼락을
촘촘히 메우고도
줄기끼리 겹치는 법이 없다.

몸싸움 한 번 없이
오순도순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초록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는
저 초록의 평화를

무서운 태풍도
세찬 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공재동·시인이며 아동문학가)
+ 담쟁이덩굴의 독법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나혜경·시인, 1964-)
+ 담쟁이 넝쿨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대웅·시인, 1962-)
+ 담쟁이 사랑

끝없이 타오르는
도벽 같은 탐욕으로

남몰래 담을 타며
밤마다 모의한다

하늘이 내린 형벌이다
중독이다 전염이다

그대 집 다 메워도
그대 맘 곁에 못 가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고 생각이 얼고

기어이
가슴 하나 남긴 채
전설 속에 사라진다

여느 해 그러하듯
여름 가고 가을 오면

움츠린 몸 뒤척이며
피가 먼저 나선다

그래도
그 흔한 사랑이라
차마 말 못한다
(이민화·시인, 1966-)
+ 담쟁이 덩굴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조원·시인, 1968-)
+ 담쟁이

온 몸이
발이 되어

보이지 않게
들뜨지 않게

밀고 나아가는
저 눈부신 낮은 포복
(정연복)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이해인 수녀의 ´나를 키우는 말´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