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8일 월요일

배한봉의 ´과수원 시집´ 외



<자연에 관한 시 모음> 배한봉의 ´과수원 시집´ 외

+ 과수원 시집

봄 과수원에
파릇파릇 돋는 저것은 풀이 아니다
노랗게 발갛게 피는 저것은 꽃이 아니다

바람에게 물어봐라
햇빛에게 물어봐라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산비둘기가 나뭇가지에 두고 간 울음
그 여운 끝자락을 붙잡고 화들짝 꽃봉오리 여는 홍매에 대해

지난겨울의 눈바람을 먹고
열병처럼 퍼지는 가뭄을 먹으며
온몸으로 대지가 쓰는 시, 나무가 쓰는 시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저 시 없다면 누가 봄이라 하겠나

저 시집 한 권 읽지 않고 어떻게 봄을 말할 수 있겠나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배한봉·시인, 1962-)
+ 자연을 닮아

내 마음은 달을 닮아
차오르기도 하고 기울기도 해

그리고 해를 닮아
떠오르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

내 마음은 파도를 닮아
밀려오기도 하고 밀려가기도 해

그리고 밭을 닮아
씨앗을 키워서 열매를 맺기도 하지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자연 예찬

꽃은 속삭이고 나무는 외친다
잎새 흔들림에도 삶이 묻어
바람이 언어를 실어다 준다

더러는 詩를 읊조리고
더러는 천일야화 이야기쟁이가 되고
더러는 가락이 되어 찬미 노래를 부른다

예지를 알고 깨닫기보다
타성에 길들어
세속 독기로 다듬잇돌 된 나

어느 산 속
깊숙한 바위틈에 기대어
흐르는 물에 몸의 먼지를 씻어내듯
내 안의 독소를 씻어내어
자연에 동화되어 볼거나!
(성지혜·시인, 1945-)
+ 자연이고 싶다 -자기·75

조금씩 개인이고 싶다
조금씩 자연이고 싶다
(이생진·시인, 1929-)
+ 자연의 아름다움

푸른 잎사귀를 옥토에 심었더니
삽시간에 거대한 잎사귀 모양의 나무로 자라나다.
엽맥이 줄기와 가지가 되어 죽죽 뻗었거니
짹짹짹 무성한 잎사귀들은 어느덧 새로 변신해 있다.
(박희진·시인, 1931-)


+ 자연의 미소

왜 이리 자연의 소리가 그립다.
그래서 자연 속에 파묻히러 간다.
꽃이 미소 짓고 반기는 꽃밭으로 간다.
말이 없는 돌의 진실함을 보러 간다.
자연 속에 우리는 말할 필요가 없다.
자연 앞에 우리는 꾸밀 필요가 없다.

바람의 속삭임을 귀로 들으며
풀의 다정함에 손을 잡는다.
어느 것 하나도 거짓이 없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다.

언제든지 있는 그대로
어디서든 주어진 그대로
창조하시고 만드신 그대로
생긴 내 모습 그대로
잔잔한 미소 그대로
늘 그 자리에서 말없이 있다.

그분의 뜻하시는 대로 살고
그분의 만드신 자연동산이
너무나도 깨끗한 아름다운 동산
찾아와 보니 눈물이 난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조동천·아동문학가, 서울 출생)
+ 자연의 법칙

때가 와서 꽃은 피고
때가 되면 꽃은 진다.

어쩔 수 없이 와서
어쩔 수 없이 가는

생.

불러내지 않아도 해는 뜨고
보내지 않아도 해가 지는 것처럼.
(정성수·시인, 1945-)
+ 자연의 시간표

자연 그대로 간다
창조주가
애초에 설계하고 만든 대로
순리에 따라 조용히 순응하며 간다

억지를 쓰지 않는다
욕심을 내지 않는다
탐하여 뒤돌아보지 않고
역리는 한사코 배척하며 간다

지은 바대로 그저 물 흐르듯이
아무 것도 해치지 않고
서두름도 지체함도 없이
자연의 시간표 그대로 묵묵히 간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자연은 신이다

자연은 신이고 신은 자연이다

인간이 신을 이길 수 없듯
자연을 이길 수도 없다

신을 모욕하는 인간에게
신이 노하듯
자연을 해하는 인간에게
자연도 노한다

신이 절대자라면,
자연은 과학을 초월하는
또 다른 신이다

신을 섬기는 것만큼
자연을 섬기는 인간은 없다

환경 파괴와 방종으로
거세어만 가는 자연의 진노
(안재동·시인, 1958-)
+ 자연율

오지에 가서 알았다.
저절로 싹트고 피는 풀꽃을

가랑잎 밟고 알았다.
미물처럼 사람도 바스락거림을

풀쐐기에 쏘이고 알았다.
은자처럼 숨어사는 생명을

풀벌레 울음 뚝 그치고 알았다.
천적처럼 무서운 사람을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서 알았다.
천년이 한결같은 바람 소리를

풀꽃 지는 걸 보고 알았다.
바람처럼 머물다 가는 사람을

사람 없는 곳에서 알았다.
달빛처럼 그리운 새소리를
(권달웅·시인, 1944-)
+ 자연의 은혜 - 서울의 소년소녀들에게

애들아 들어라
이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라.
지금은 12월 겨울이지만
이윽고 내일
봄이 온다.

자연은 커다란 문을 열고
자연의 은혜를
활짝 열어 줄 것이다.

산이나 들에
꽃이 만발하고
싱싱한 나무가
너희들을 맞이할 것이다.

자연의 은혜는
너무도 넓고 기쁘다.
시골에 가서
그 자연의 은혜를
맛보아라.
(천상병·시인, 1930-1993)
+ 자연의 교훈 앞에

이른 봄
알몸으로 피어난 홍조 띤
벚님의 요염함도 일색이었습니다만
4월이 지나는 길목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연둣빛 싱그러움에 하얀 그리움을
가미한
고고함을 자랑하는 이팝꽃 줄선 숲길
아침 햇살 받으며
오늘을 향한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아름다운 세상에 먹칠하는 이
이 맛을 알까

계절에 순응하는 초목
어제의 화려함에
미련 두지 않고
새롭게 단장하는 저 푸른 잎새 앞에
털어내지 못하고
비우지 못한
내 부끄러움을 고백해 본 아침
상쾌한 바람 눈이 시리다
(하영순·시인)
+ 자연 닮기

산에 사는 이는
산을 닮았다

바다에 사는 이는
바다를 닮았다

산을 닮아 포근하고
바다를 닮아 넉넉하다

도시에 사는 이는
도시를 닮아 창백하다

그러므로
자연에 의지하여 산다는 건
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공석진·시인)
+ 천연의 음악회

수풀 속 아름다운 새들의 소리
구슬 구르듯 계곡의 물소리
천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빨간 햇빛이 산너머 숨바꼭질하며
엷은 먹물 붓끝으로
어둠에 쌓여가는 세상을 그리네

달빛이 밝은 밤에
푸른 솔밭 끝없는 백사장에
살며시 밀려오는 작은 파도소리
은은히 들려오는 바다의
작사 작곡 모두 그분의 작품

그 누구도 부를 수 없는 노래
천연의 노랫소리
그분의 음악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이 모두가 그분이 창조한
아름다운 천연의 소리
(황순이·시인)
+ 열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세영·시인, 1942-)
+ 자연으로

떠나자.
향내음 맡으러

엉킨 것 풀고
신선 마시러 가자.

무거운 짐 부리고
순수 세계로 출발하는

예의 바른 손님이여!
그대를 부른다.
(강신갑·시인, 1958-)
+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동차는 잠시 세워두고
휴대전화는 던져두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자연의 숨결을 느껴보자

텔레비전은 꺼두고
컴퓨터는 밀쳐두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푸른 하늘에 그림 그리는
구름도 보고
나뭇잎 간질이는
바람도 보고
산새들의 멋진 춤도 보면서
자연을 즐겨보자

도시에 찌든
눈과 귀
몸과 마음
자연 속에 풍덩 빠뜨려 보자.
(이문조·시인)
+ 자연으로 돌아가라

훌훌 버릴 것은 욕심이요 집착이니 다 버리고
숲속 향기 속으로 빠져버린 우린 행복하다.
소유할수록 무겁고 힘겨운 것을...
버릴수록 가벼워지는 것을 알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나
자연으로 돌아가라
아픔과 고통이 줄고 자연의 어머니가
너희를 살릴 것이니
잘못을 하루에 고치려 말라
급히 쓰는 약은 다른 것을 망가트리며
세월에 약은 느리지만 확실하여 숲속의 향기와 같고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
행복의 안식을 느끼리라.
(정윤칠·시인)
+ 자연으로 가는 길섶

약혼식 날 끼워주었던
백년가약의 다이야 반지
아파트의 평수를 늘이느라
처분하고부터는
패물 없이 살아간다

그 잘난 반지 하나로
집을 비울 땐
화분 속에 집어넣거나
쌀뒤주에도 감추면서
항상 불안하였다

가스 밸브만 확인하고
대문을 나서면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바라보며
한 발 한 발 대지에
입맞춤한다

과거의 굴레를 벗기 위해
각종 기념패도 없애고 나니
지붕에 비만 안 새고
양식만 떨어지지 않으면
더없는 행복이다
(김내식·시인, 충북 영주 출생)
+ 한 송이 꽃

이름에 속지 마라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이름은
항상 그 이름으로 있는 게 아니다
이름이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다

말이나 글에 얽매이지 마라
세상만사 이치를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대신 말이 전하려는
그 무엇에 아무쪼록 가 닿도록 하라

이렇다 저렇다 상대성을 말하지만
우리가 가 닿으려는
모순통일의 제자리에서 들여다보면
아름다움과 추함이 없고
대와 소가 따로 없고
빈부도 그렇다
산지사방 흩어져서
모두가 하나 되는 자연의 품안에서는
어떤 모양, 나름대로 되었건

한 송이 꽃
(문무겸·시인, 충남 당진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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