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5일 목요일

증발 - 서동균

증발 / 서동균


벽에 금이 갔어요 위아래층에서 물을 쓰면 다 들리고요 더 갈라지나 보려고 누군가 사인펜으로 콩콩 찍어놨어요 어쩌면 글씨를 못 쓰는 204호 아줌마일지도 몰라요 40년 정도 된 건물인데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타일조각에 잠을 못자는 사람들이 바닥을 삭삭 긁으며 시간을 밀어내기도 해요 건조를 서두른 편백나무처럼 누르고 밀다가 더 뒤틀린 게 틀림없어요 표시를 해 놓은 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옥상까지 이어져 있어요 아래층은 별로 안 그런 것 같고 맨 위층이 더 심하거든요 숲으로 가는 길일지도 모르죠 햇살에 걸린 침묵처럼 가로세로 금이 선명해요

간경화로 고생하던 김씨가 지난 겨울 짐을 싸서 금 안으로 들어 갔어요 동네에선 혼자 살다가 숲 속으로 야반도주를 했다고들 해요 미로 같은 금이라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매끄럽던 계단 바닥은 자식놈 걱정하다 흉부통으로 쓰러진 305호 아줌마의 손톱조각 같아요 어쩌면 대패를 숲으로 날려버렸을지도 모르죠 시멘트가 울퉁불퉁 잘 깨지거든요 재건축을 한다고 안전진단도 받았어요 계측기들이 끊어진 먹선을 찾아 다니네요 수축팽창에 적응하지 못한 기둥이 층층이 살점을 떨어내고 있어요 둥치가 우지끈 흔들리면 김씨와 305호 아줌마같이 증발할 수도 있다네요

2012년 <시현실> 봄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