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3일 일요일

정동묵의 ´나도 너처럼´ 외


<나무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정동묵의 ´나도 너처럼´ 외

+ 나도 너처럼

살(矢)처럼 곧은 녀석도
나름의 이유야 있겠지만
한 마디 자라 고민하고
또 한 마디 자라 반성하면서
우듬지까지 올라야만
진정한 나무 아니겠나
(정동묵·시인)
+ 나는 나무입니다

나는 나무입니다
씩씩하고 건강한 나무입니다
부지런히 일하지만
자유로운 나무입니다
나는 언제나 정직합니다
내 도움을 받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나는 항상 기쁘고 만족합니다
여러분, 내게로 오십시오
나는 나무입니다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임경빈·시인)
+ 나무

나무는 사람이 아니다
귀가 없고 눈이 없는
나무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캄캄한 펌프질로 길어올리는
손도 팔도 다리도 없는

나무는 서서 생각하고
서서 잠자는 그늘인가 했다

때로 햇살을 흔드는 손짓 같기도 하고
내심을 감추고 서서 속으로 되새기는
웬 더딘 말씀인가 했다
(정병근·시인, 1962-)
+ 나무

나무는
한 자리에 서 있어도
잎으로 끝없는 바람의 노를 저어
푸른 입김을 대기에 가득 심는다.

나무는
기교의 손이 없어도
긴 여름 먼 일광(日光)의 끈들을 뽑아
생명의 주머니를 곱게 짠다.

그대 보고 듣고 움직이는
교만한 자여,

나무는
발도
눈도
귀도 없이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여기까지
이렇게 이미 와 있다.
(임보·시인, 1940-)
+ 초록 꽃나무

꽃 피던 짧은 날들은 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빛깔로
돌아와 있다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나무는 다시 똑같은 초록이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아도
꽃나무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된다
그렇게 함께 서서
비로소 여럿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고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숲을 이룬다
꽃 피던 날은 짧았지만
꽃 진 뒤의 날들은 오래도록
푸르고 깊다
(도종환·시인, 1954-)
+ 겨울 나무

꽃눈은 꽃의 자세로
잎눈은 잎의 자세로 손을 모으고
칼바람 추위 속에
온전히 저를 들이밀고 서 있네
나무는,
잠들면 안 된다고
눈감으면 죽는다고
바람이 둘러주는 회초리를 맞으며
낮게 읊조리네
두타頭陀*의 수도승이었을까
얼음 맺힌 눈마다 별을 담고서
나무는
높고 또
맑게
더 서늘하게는 눈뜨고 있네
(복효근·시인, 1962-)
* 두타(頭陀) :
산야를 떠돌면서 빌어먹고 노숙하며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음,
또는 그런 수행을 하는 중을 뜻한다
+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

향나무 웃자란 가지를 치는데
순식간에 벌이 장갑 낀 손가락을 쏜다
손가락이 쿡쿡 쑤시고
손등이 부어오르고 팔뚝까지 얼얼해진다
그러나 벌집이 숨어 있는 위험한 향나무를
나는 버릴 수 없다 떠날 수 없다
독이 오른 아픈 손으로
나는 다시 전지를 한다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불바다에 뛰어든 그
전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고
두 다리를 잃어버린 역무원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구나
목숨을 거는 것이구나
사랑 있어
캄캄한 세상도 희망이 되는구나

화끈화끈 쑤시는 내 손끝에서
벌집이 숨어 있는 위험한 향나무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차옥혜·시인, 1945-)
+ 나무를 생각함 - 손택수 형에게

나무는 제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둥글게 첫 나이테를 말기 시작할 때부터
나무는 언제나
다가올 제 운명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제 몸에 명주실을 걸어
소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어깨를 기대
집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제 살을 깎아
부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나무는
한평생 나무로만 살다가
어느 짧은 순간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나무는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잎사귀에 고이는
나지막한 봄비의 가르침만으로도
나무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최갑수·시인, 1973-)
+ 나무를 위한 예의

나무한테 찡그린 얼굴로 인사하지 마세요
나무한테 화낸 목소리로 말을 걸지 마세요
나무는 꾸중들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는 화낼만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네 가족의 가훈은 <정직과 실천>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싹을 내밀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 맺어 가을을 맞고
겨울이면 옷을 벗어버린 채 서서 봄을 기다릴 따름이지요

나무의 집은 하늘이고 땅이에요
그건 나무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때부터의 기인 역사이지요
그 무엇도 욕심껏 가지는 일이 없고 모아두는 일도 없답니다
있는 것만큼 고마워하고 받은 만큼 덜어낼 줄 안답니다

나무한테 속상한 얼굴을 보여주지 마세요
나무한테 어두운 목소리로 투정하지 마세요
그건 나무한테 하는 예의가 아니랍니다
(나태주·시인, 1945-)
+ 절필 - 한라산 구상나무에 바침

끝끝내 저 나무는 색(色)에 들지 않는다
바람에 끝을 벼린 바늘잎 세필로는
격문(檄文)은 쓰지 않겠다 붓을 꺾은 고사목

뼈를 깎는 뉘우침이 골각체(骨角體)를 만든다
산세가 험할수록 더 명징한 산울림이
오히려 필화(筆禍)가 되어 눈 퍼붓는 한라산

세상에 맞서려면 저렇게 간결하라
살점은 다 버리고 흰 뼈만 내리꽂는
저 뻣센 반골의 획이 가슴팍에 박힌다
(이성목·시인, 1962-)
+ 나무

나무가 쑥쑥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은
밝은 해를 닮고자 함이다.

그 향일성(向日性)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을 닮고자 함이다.
잎새마다 어리는
그 눈빛.

나무가 저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은
별들을 닮고자 함이다.
바람 불어 한 세상 흔들리는 날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견디는 그
따뜻한 가슴.

나무가 촉촉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것은
은핫물을 닮고자 함이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흘려 준
한 방울의 물

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러하시듯
산으로 가는 길은 하늘 가는 길.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 마음. 하늘생각 가슴에 품고
먼 날을 가까이서 살기
때문이다.
(오세영·시인, 1942-)
+ 나무

어딘지 모를 그곳에
언젠가 심은 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다.

높은 곳을 지향해
두 팔을 벌린
아름다운 나무
사랑스런 나무
겸허한 나무

어느 날 저 하늘에
물결치다가
잎잎으로 외치는
가슴으로 서 있다가

때가 되면
다 버리고
나이테를
세월의 언어를
안으로 안으로 새겨 넣는
나무

그렇게 자라 가는 나무이고 싶다.
나도 의연한 나무가 되고 싶다.
(김후란·시인, 1934-)
+ 나무

아름드리 나무이든
몸집이 작은 나무이든

나무는 무엇 하나
움켜쥐지 않는다

바람과 비와 이슬
햇살과 별빛과 달빛

온몸으로
포옹했다가도

찰나에 작별하는
비움의 미학으로 산다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굳게 지키면 그뿐

눈부신 꽃과 잎새들도
때가 되면 모두 떠나보내

한평생
비만증을 모르고

늘 여린 듯 굳건한
생명의 모습이다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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