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6일 토요일

강연호의 ´표정´ 외


<돼지에 관한 시 모음> 강연호의 ´표정´ 외

+ 표정

저 돼지머리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고삿상 위에서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인간의 미소로, 가령 염화시중의 미소로 잴 일 아니다
지폐 몇 장 물렸다고 웃을 그도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그의 굴욕을 부채질할 뿐이다
누군가 멱을 따고 동강난 머리통을 푹푹 삶아내는 동안
그 역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큰 콧구멍이 그래서 더 벌름거렸을 것이다
누군들 고삿고기로 마감하는 생이고 싶겠는가
그는 이제 꿀꿀거리지도 꽥꽥거리지도 않지만
고요와 안식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지금 생각에 잠긴 것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저들이 긍휼히 여길 것인가
그의 참담함은 이래저래 깊다
어째야 하나 내가 아무리 울고불고 찡그리고 애원해도
저들은 내가 여전히 웃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지들은 킥킥 웃는데
저런 개돼지만도 못한...
욕을 하다 말고 돼지머리는 거의 울상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삼겹이나 되는 깊은 속에 있다
그러나 굴욕을 견디는 건 온전히 그의 몫이다
(강연호·시인, 1962-)
+ 돼지에게 절하다

돼지꿈을 꾸면
재수 있다고 복권을 사지만
미식가들의 입만 즐거울 뿐
돼지의 참모습은 모르고 산다

돼지는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다
먹고 그 자리에 눕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한다

그러나 인간은
돼지의 삶과 죽음에 대해 기억하진 않는다
그저 천한 돼지로만 안다
목에 칼이 들어올 때 기막힌 절규를
돼지 멱따는 소리로 기억한다

기름진 논밭
주검으로 차려진 진수성찬
뜀틀 뒤의 매트리스
이 모든 후의厚意를 무시당한 채

인간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고작
고삿상 위에 올라가 절을 받는 것
(박근수·시인, 1956-)
+ 복 돼지

고사상에 웃고 있는 잘 생긴 돼지머리
죽어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로움

돈(豚) 돈(錢)을 물고
사람들은 복을 빈다

돼지 해(年)
황금 돼지 해(年)
돼지처럼 풍성한 한 해
복 받는 한 해가 되기를

복 돼지에게 빌어본다.
(이문조·시인)
+ 돼지머리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다
가마솥이 마당에서 끓고
돼지를 잡아 삶았는데
이놈 삶은 돼지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아버지는 돼지의 웃음을 다치지 않게 썰고 있다
소주 한 잔 벌컥 들이켜며 웃음 한 조각을 먹는다
캬! 죽을 때는 요런 표정으로 죽을 수 있을까
접시마다 귀도 웃고 코도 웃고 눈도 웃고 있다
동네분들과 문상객들이
껄껄껄 돼지 웃음을 먹고 있다
(장인수·공무원 시인, 강원도 인제 출생)
+ 산돼지

송골재 너머 산 밭 고구마밭에 갑니다
산돼지 내려와 파헤친 밭 살피러 갑니다
멀리서 보기엔 줄기 멀쩡한 것 같아도
가까이 보니 온통 다 헤집어 놓았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철없는 짐승이라지만
아직 밑이 들지 않은 걸 무슨 심술로
저리 망쳐놓은 건지 화가 나긴 하지만
무작정 욕을 해대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아 글쎄 아직 젖을 떼지도 않았을 것 같은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더라지 뭡니까
(강인호·시인)
+ 돼지

살아생전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인간의 전매특허, 미소
죽어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배려해주신
신이시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입 가득 얻은
저승 노잣돈
배춧잎 돌돌 말아
양 콧구멍으로 쌍 나발까지 불게 될 줄이야

먼 저승길 떠나는 나를 위해
새 차까지 뽑아 진수성찬 차려놓고
술 권하며 절을 하니
낯선 대접에 그저 감개무량할 수밖에

눈감으면 어차피 썩어문드러질 이승이려니
아랫도리도 어디 가서
부위별로 분리되어
뼛속까지 고소하게 토해 보시하겠지
(권오범·시인)
+ 돼지막

논산 육군 훈련소가 있는
연무대읍 뒷동네
꽃순이들 모여 살던 곳
밤에도 붉은 등 푸른 등
꺼지지 않던 수상한 골목
20년도 훨씬 지나
깊은 밤을 찾아가 보니
그 많던 꽃순이들 간 곳이 없고
푸른 등 붉은 등 불빛은 꺼진 지 오래
꽃순이 살던 집들은
돼지막이 되어 있었네
억울하게 팔려가기론
돼지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란 말인가…
(나태주·시인, 1945-)
+ 돼지국밥

남면 삼거리 식당
산타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급급한 나
새로 담근 겉절이라며 내놓고 즐거워하는 주인
친정에서 내일 갓김치가 올 테니 기대하란다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처럼 허룽대며 먹은 국밥
뒷맛이 혀 돌기마다 싸하게 감친다
내일은 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본 적이 없다
내게 내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그녀
작은 식당 손님 많지 않지만 늘 즐거운 그녀
내일이라는 희망을 후루룩 돼지국밥에 얹어준다
식탁 어섯 흘레붙는 파리 한 쌍마저 곱기만 하다
(최범영·시인, 1958-)
+ 돼지국밥집 여자

아무도 몰랐다.
돼지국밥 팔아 목숨 이어온 꽃 같은 여자
거울 속으로 떠난 뒤, 왜 돌아오지 않는지
하루에 나이 수만큼 거울 보면서 서리 맞은 꽃으로 핀
자신의 모습 보면서
돼지 국밥 속에 아픔 얼마나 던졌나
국밥국물보다 진한 눈물 흘리던 엄니를 던지고
엄니 얼굴에 노란 해바라기로 앉아, 엄니 따라 맴돌던
그리운 외할매 돼지국밥에 던지고
진도 아리랑 가락으로 건너간 남정네, 달빛 같은 체온을
돼지국밥에 던지고, 어린왕자처럼 사막의 밤으로가
별이 되어버린 외아들, 돼지국밥에 던지고
초겨울 깊은 밤, 허기진 은하에서 걸어 나온 영혼과
돼지국밥에서 솟아나는 김에 서린 환상 만나고
거울 보다가, 거기 거울 속으로 걸어가 사라진
돼지국밥집 여자 그림자도 남기지 않았네.
하루에도 나이 수만큼 들락거리던
거울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갔네.
(김찬일·시인, 1949-)
+ 돼지 잡기

옛날에 돼지를 잡는 날이 있었다
돼지를 잡는 날이면은
온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잔치를 축하하는 것이었다
우리 고모부님은 더욱 신이 나서
스스로 돼지 목을 따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고
다른 사람이 그 돼지를 붙잡는 것이다
우리 쌍둥이형과 나는 돼지가 불쌍해서
돼지 잡는 내내 귀를 틀어막고, 문을 닫고,
그 제사가 끝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돼지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신명나게 울리던지
그 소리를 듣고 온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돼지 하나로 온 동네가 흥건해지는 날이었다
(박재동·시인)
+ 똥돼지 현주소

현대판 음서제 부활로
애비도 덕보고 새끼도 태어날 때부터 보아
외국국적 취득, 전쟁 나면 36계 줄행랑

애비 잘 만나 취직 걱정도 없음
졸돼지 부하들이 꿀꿀 입을 맞춰
애비돼지 최고 직장에 1순위로 들어감

아주 불공정한 이 사회에서
위장전입으로 강남8학군배정, 군대도 빠짐
혼사는 똥돼지들끼리 접붙이면 됨

돼지가족 도덕성은 돼지목걸이로 빛을 발함
돼지들이 영순위로 판을 치는
돼지들 배만 키우는 위대(胃大)한 공화국.
(이승복·시인)
*음서제: 조부, 부의 품계가 높은 경우 그 자, 손은 무시험추천 등용하는 제도.
+ 돼지! 그리고 비디오

옛날 옛날 사람들은 돼지를 먹었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는다. 돼지가 죽는 줄 모른다. 돼지 비명 소리,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팍 찔려 죽는다는 것,
아, 돼지가 죽는 것을 못 본다.

불쌍하다, 돼지를 못 보고 돼지고기만 먹는 사람들이. 돼지처럼 돌아다니다가 돼지처럼 죽을 줄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돼지처럼 하느님이나 도사들한테 달려가서 제발 좀 살려달라는 사람들이.

돼지의 실패를 거울 삼아 돼지완 다르게 죽지 못하는 현대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지금, 자연으로 가자! 돼지 잡으러 가자!고 할 수는 없고

몽테스키외가 그랬던 것처럼 매일매일 죽음을 상상하거나

몽테스키외와 다르게 하려면 돼지처럼 죽는 것들을 찾아다니길 권한다.
돼지처럼 죽는 것들,
저수지의 개들을 보라, 터미네이터를 보라,
샘 페킨파를 찾으라!
돼지 죽음을 실내에서 매일매일 볼 수 있다는 것,
현대적 복(福)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 죽을 때 돼지보다 조금 낫게 죽는 일, 중요한 일이다.
(박찬일·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박재삼의 ´12월´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