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상자
- 데우칼리온의 독백
내 사랑 판도라
그대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대의 꿈은 무엇인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청맹과니였노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 세상에 오직 나 홀로 서 있으니
다가갈 그대조차 만들어지지 아니하고 있었으니
사랑을 빼놓고는 부러워 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노라
여신들이 시도때도 없이 내 주위를 맴돌고
살품 파고들어도 그저 그것뿐
그래도 몰랐노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런 나를 질투하여 신들이
그대를 만들고 그대 꽃피어나도
그때도 몰랐노라
그대에 대한 꿈, 그대에 대한 희망이 없었으니
어찌 사랑인들 알 수 있었으랴
그대는 나의 어쩔 수 없는 친구일 뿐
우리 사이에는 어떤 번쩍임도 뜨거운 열기도 없었노라
손을 잡고 온 들판을 헤매어도
호수에서 서로의 몸에 물방울을 튀기면서도
헤어져 있으면 그저 그 뿐
보고 싶은 마음도 일지 않았노라
그러던 어느 날
신들이 그대에게
상자 하나를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
열어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신들은 선물에 금(禁)줄을 둘렀다는 말 들었노라
어리석은 자, 신들이여
선물이란 그 자리에서 열어보아야 당연한 것
˝이 지시를 따르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 하자
따라야 하는가 어겨야 하는가
지시를 따르면 지시를 어기게 되고
지시를 어기면 지시를 따르게 되는 것을
판도라 그대는 상자를 열었노라
선물은 그저 선물이라며
지시를 따르면서, 따르지 아니하면서
그 후 이야기
다 아는 뻔한 이야기라고 말하지 말라
인간을 괴롭히는 못된 것들은 모두 튀어 날아오르고
희망만 상자 안에서 붙들렸다고 말하지 말라
아직 그대와 사랑을 나누지도 못했거늘
어찌 그대와 나 이외의 인간이 태어날 수 있었으랴
하물며 질병이나 자연재해, 전쟁과 같은
끔찍한 재난들이 튀어 나올 수 있었으랴
튀어나온 것은 절망이고
붙들린 것은 꿈이요 희망일 뿐이라
그리고 나는 변했노라
그대를 만나면 까닭없이 눈길이 부러지고
그대와 헤어지면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는 것을
그대가 내 곁에 있지 못한 것이 서러워
밤이면 베개에 흘린 눈물은 또 얼마이던가
기도하고 또 기도했었다
그대 손이 이 눈물 닦아주기를
이루지 못하는 꿈, 이루지 못한 희망이라도
그대로 꿈꾸고 바라야만 하는가
신과의 결혼식에 그대가 날 초대했을 때
처음으로 상자를 열었던 그대를 원망했노라
그래도 그래도 버리지 못했노라
그대에 대한 꿈을, 그대에 대한 희망을
그러나 그대는 영영 내게 오지 아니하였노라
이것이 그대가 연 상자에 남았다는 꿈인가 희망인가
꿈은 희망은
그리움을 사랑의 슬픔을 이별을
주렁주렁 자신의 가지에 매달았노라
나는 그대가 낳은 딸과 결혼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고
그리움과 사랑의 슬픔, 이별을 유산으로 남겼노라
억겁 세월이 흘러 다시 태어난 나는
그대로부터 상자 하나를 받았노라
열어보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리고 내 의지를 시험 당하고 있노라
그래
내 의지가 문제이지
그러나 보다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는 줄 그대는 아는가
상자 안에는 과연
′절망′이라는 말이 들어 있을까
′희망′이라는 말이 들어 있기나 할까
그대에게야 정말로 쓰잘데없는 고민이겠지만
그래도 내게는
생과 사를 여닫는 화두(話頭)로 다가오고 있노라
희망 없이도 그대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절망일망정 끌어안으며 그대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상자를 향해 내 손이 다가가고 있느니
열 것인가, 그대로 밀쳐버릴 것인가
끝없는 갈등에 흔들리고 있노라
그대는 무슨 맘으로 이 상자를 보냈는가
알 수 없는 의문부호만 허공을 떠돌고 있노라
(후기)
나는 항상 만일 판도라 상자에서 튀어나간 것이 희망이고 붙들린 것이 재난을 가져오는 것이라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쓰잘떼없는 고민을 하곤 한다
그때는 희망은 우리를 부르는데 막상 인간들은 희망을 가지지도 못하고 혼자 자멸하는 현상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판도라는 인류를 위해 정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 이상 판도라에 대한 비난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은 남자로서 프로메테우스가 창조한 데우칼리온이다. 최초의 신이 아닌 여자는 판도라이고 신들이 창조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데우칼리온을 흙으로 자신과 신을 본딴 모습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인데 이에 신들이 질투하고 판도라를 만들어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좋지 못한 특성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여기서 여성비하적 요소가 들어나는데, 어쨌든 판도라 상자는 신들이 판도라에게 준 선물이 된 것이다.
판도라라는 말은 ′모든 선물 중의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판도라가 결혼한 상대는 데우칼리온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의 현명하지 못한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이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보자 즉시 반해버렸고 둘은 결혼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 퓌라인데 이 퓌라가 데우칼리온과 결혼하여 인류 최초의 여성이 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 생애를 개선하기 위해 신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불을 훔쳐내 인간들에게 제공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아이스퀼로스가 쓴 글에 의하면 제우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신들중의 신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항상 누가 자신을 꺾고 신들 중 신의 지위에 오르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프로메테우스에게 누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을 물었는데 프로메테우스는 끝내 대답을 거부했다. 엄청난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는 타협을 하게 된다. 즉 인류가 세계질서의 근본토대를 위협하지 않는 한 그들이 능력을 펼쳐나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옹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