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4일 화요일

송찬호의 ´나비´ 외


<나비에 관한 시 모음> 송찬호의 ´나비´ 외

+ 나비

나비는 순식간에
잭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송찬호·시인, 1959-)
+ 나비

우화등선羽化登仙,*
천국에의
눈부신
예감
(임보·시인, 1940-)
*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치어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됨.
+ 나비가 앉았던 자리

이것도 사랑이라고 꽃이 피는구나
이것도 이별이라고 꽃이 지는구나
이것도 인연이라고 흔적이 남는구나
잠시 머무른 자리가 참 고요하구나
(한옥순·시인, 1957-)
+ 나비가 되는 꿈

수평선 저 너머에서
노랑나비 한 쌍을 부른다

겨우내 날고 싶었을 나비는
눈부신 햇살을 타고
푸른 파도를 건너와서
내 가슴에 금빛 봄을 달아준다

그 금빛으로 난 작은 나비가 되어
포르르 날아가 날개 접고 싶은 곳은
야윈 네 가슴에 피어있을 하얀 들꽃

그 노란 꿈을 위해 오늘도
난 겨드랑이에 날개 다는 연습을 한다
(목필균·시인)
+ 나비의 연애론

저들에게는 오히려

나비 한 마리가
꽃 한 송이에게만 머무는 건

불륜이다, 되려

이 꽃 저 꽃 건드려가며
천 배의 생명을 낳는 게

미덕이다, 그렇게

한결같은 자세로 저를 받아들이는 꽃들에게
항상 똑같은 눈금의 마음을 건네는 나비들
(박완호·시인, 충북 진천 출생)
+ 나비를 읽는 법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박지웅·시인, 1969-)
+ 무기수를 찾아온 천사

높은 교도소 담을 넘어
무엇 하러 왔을까
꽃은 눈이 퉁퉁 붰는데
꽃을 달래러 온 것일까
무기수가 십 년째 맞는 봄
희나비가 찾아온 철창 밖
이 사람에게 무기징역을 매긴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비야 너는 누가 보낸 천사냐
(이생진·시인, 1929-)
+ 네 가슴에 나비

이 가슴에 훈장 하나 매달려 있지 않는데도
사랑해서 기쁘다
사랑은 훈장으로 당할 수 없는 전적
사랑을 빼앗겼을 때
어떤 훈장의 박탈로도
그 아픔을 비교하진 못한다

네 가슴에 꽃보다
산 나비 하나 달아줄까
항상 고독으로 무너지던 네 가슴에
살아있는 별 하나 달아줄까

실망이 등불을 끄면
그 별 따라 별나라로 가라고
별 하나 달아줄까
(이생진·시인, 1929-)
+ 고속버스 안의 나비

고속버스 안에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휴게소에서
문을 열어 놓았을 때
날아 들어온 나빈가 보다.
버스는 창을 닫고
시속 120킬로의
고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장다리밭에서 날고 있는가 하지만
지금 나비는 가속에 실려
부산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시간이라는 이름의 버스를 타고
가속으로
종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버스의 창이 열리면
꽃밭이 있겠지만
나의 종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비와 같이 가고 있다.
(황금찬·시인, 1918-)
+ 나비의 문장

오전 10시 25분쯤 찾아오는 배추흰나비가 있다
마당가에 마주선 석류나무와 화살나무 사이를 수차례 통과하며
간절하게 무슨 문장을 쓰는 것 같다
필시 말로는 안 되고 글로 적어야 하는 서러운 곡절이 있을 것 같다
배추흰나비는 한 30분쯤 머물다가 울타리 너머 사라진다
배추흰나비가 날아다니던 허공을 끊어지지 않도록 감아보니
투명한 실이 한 타래나 나왔다
(안도현·시인, 1961-)
+ 나비

열렸다 닫혔다하며 날아다니는 소책자
세상에서 가장 얇은 전집
뫼비우스의 띠
표지도 서문도 추천사도 없는
표지가 곧 내용인
모두 읽었으나 누구도 읽은 적 없는 올봄의 신간
나보코프가 나비 채집상자로도 읽어내지 못한 신비의 책
읽으려들면 휘발해버리는 비밀의 금박문자
허공에 찍는 태양의 무늬
샵이나 플랫이 여럿 붙은 소리 없는 춤추는 악보
바람결에 흔들리는 돛단배, 몸보다 커다란 날개 속에 떨림을 감춘
무작정 떠나고 보는 탐험가, 태양광발전기도 배터리도 독침도 없이
배낭도 나침반도 향기지도도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허공의 조가비
부금도 펀드도 보험도 없이
가진 거라곤 빛의 씨실 날실로 짜여진 모슬린 모포 한 장
제 버거운 영혼에 두르고 다니는 홑겹 사리
너는 늘 네 일에 열중하지
와인소믈리에 커피바리스타 향수제조자도 부럽지만
너는 뚜쟁이 꽃가루 택배기사 꿀맛 감식가
긴 더듬이로 빛과 어둠 더듬으며
꿀샘 깊숙이 고사리햇순 같은 대롱을 꽂고
작은 몸 떨면서 숨은 꿀을 음미하지
허나 뭐니뭐니 해도 나의 시선은 시멘트 담벼락 위 내려앉은
네 가느다란 다리에 머문다네
그리고 너무 작은 내 발 들여다보지 가까스로, 이 땅에 서 있는
(박은율·시인, 1952-)
+ 나비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美다.
나비가 앉으면 순간에 어떤 우울한 꽃도 환해지고 多彩로와진다. 變化를 일으킨다. 나비는 福音의 天使다. 일곱 번 그을어도 그을리지 않는 純金의 날개를 가졌다. 나비는 가장 가비야운 꽃잎보다도 가비야우면서 영원한 沈默의 그 空間을 한가로이 날아간다. 나비는 新鮮하다.
(김춘수·시인, 1922-2004)
+ 나비

온전히 펼쳤다가 접는데 한 생애가 다 걸린다는 책이라고 한다 그 한 페이지는 하늘의 넓이와 같고 그 내용은 신이 태초에 써놓은 말씀이라고 한다 벌레의 시간과 우화의 비밀이 다 그 안에 있으나 장주莊周도 그것이 꿈엣 것인지 생시엣 것인지 알지 못하고 갔다 하니 내가 무엇을 더 보태어 말하랴 꽃과 더불어 놀고 꿀과 이슬을 먹고 산다 하는 전설도 있다 지금 내 앞에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저 책을 보고 천박하게도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 한 여자의 생을 떠올리고 어깨를 들먹이며 잠시 흐느꼈으니 필시 저 책이 나를 들었다 놓은 것이다 책이 나를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 책이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복효근·시인, 196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현종의 ´빨간 담쟁이덩굴´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