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이해인의 ´빨래를 하십시오´ 외


<빨래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빨래를 하십시오´ 외

+ 빨래를 하십시오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날이
소리내며 튕겨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애인이 그리운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물 속에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웃을 거예요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몇 차례 빨래를 헹구어내는
기다림의 순간을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예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빨래

오늘도 빨래를 한다.

옷에 묻은 나의 체온을
쩔었던 시간들을 흔들어 빤다.

비누 거품 속으로
말없이 사라지는 나의 어제여
물이 되어 일어서는 희디흰 설레임이여

다시 세례 받고
햇빛 속에 널리고 싶은

나의 혼을 꼭 짜서
헹구어 넌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빨래

빨래로 널려야지
부끄럼 한 점 없는
나는 빨래로 널려야지

피 얼룩
기름때
숨어살던 눈물
또 서툰 사랑도
이젠 다 떨어버려야지
다시 살아나야지

밝은 햇볕 아래
종횡무진 바람 속에
젖은 몸 다 말리고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김혜숙·시인, 1937-)
+ 바람 부는 날

빨랫줄을 보면
또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 적 기저귀가
거기 널려 있습니다.

내 맘속에도 바람이 불고
어머니의 머리칼이 날립니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엔
빨랫줄의 빨래집게가 젤입니다.

빨래집게를 보면서
또다시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이정우·시인, 1946-)
+ 빨래

초록빛 물통 가득
춤추며 일어나는 비누 거품 속에
살아있는 나의 때(汚)가
울며 사라진다.

나는 참 몰랐었다.
털어도 털어도 먼지 낀 내 마음 속
너무 오래 빨지 않아
곰팡이 피었음을
살아있는 동안은
묵은 죄를 씻어내듯
빨래를 한다.
어둠을 흔들어 헹구어낸다.
물통 속에 출렁이는
하늘자락 끌어올려
빳빳하게 풀 먹이는
나의 손이여.
무지개 빛 거품 속에
때묻은 날들이
웃으며 사라진다.
(작자 미상)
+ 빨래

걸려있어야 할 최후의 정당한
까닭으로
여기 선상에 놓인 옷감들처럼
이토록 청명한 빛에
나도 펴고 털어 말려야할까

마지막 남은 허위와 위선의 물기까지
다 빠져나가기를 바라
나를 널어야할까

새하얀 속살같은 그 무지한 영혼만
집게에 남겨지도록
그리고 나부끼도록
온종일 어느 창조의 줄에든 걸려있고 싶다
(윤한영·시인)
+ 이분법에 대한 일상의 소견

햇볕에 빨래를 내다 건다
햇살에 걸린 빨래들,
너무 오만하게 지쳐 섰던 영혼이
햇살에 오징어처럼
타 없어질 때까지
일광욕중이다

몸과는 사이가 나쁜 영혼에게
영혼이라는 말에 갇혀 영영 우울한 영혼에게
가을 하늘, 햇살에 걸린 빨래들에 섞이어
제 순수를 잃어버릴까,
잔뜩 겁먹은 영혼에게
개살궂은 사내처럼
간지럼 태우다

깔깔,
영혼도 웃다가 배를 움켜쥐고 자지러진다
웃다가 오줌도 새는 줄 모르고
눈물이 쏙 빠지고
혼이 달아난다
영혼에 영혼의 얼룩이 빠지고
영혼은 비로소 다른 것들과 구별되지 않고
평범해졌다, 깨끗해졌다

햇살 참 좋다,
(조하혜·시인, 1972-)
+ 아내의 빨래공식

아내의 빨래공식은 늘 일정하다
물높이 중간에 놓고
세탁 십 분 헹굼 세 번
탈수 삼 분 후에 다시 헹굼 한 번

그러나 간혹 공식이 파기될 때가 있다
남편 잘 둔 친구를 만났다던가
나의 시선이 그녀를 빗나갔다 싶은 날이면
아내의 빨래 법칙엔 밟아빨기가 하나 추가된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거실에 앉아
아내가 세탁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잔소리가 어디서부터 터질 것인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다가
거실을 정리하다가 하지도 않던 걸레질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온 날에도
아내가 빨래하는 시간만 되면 늘 긴장한다
예정된 공식대로 세탁기가 돌아가면
그제서 오늘의 스포츠 뉴스를 본다
(이기헌·시인, 1958-)
+ 빨랫줄에 행복을 널다

일요일 오후
외출한 아내가 전화기로 지령을 내린다
세탁기 멈추었으면 빨래 좀 널어라
마누라 말 잘 듣는 것이 세상 공덕 중에 으뜸이라고 하니

달콤한 잠결에 들리던 규칙적인 회전음이 빨래 소리였구나
빗소리로 들리던 휘파람소리가 헹굼 물 빠짐 소리였구나
둔탁하게 베란다 창을 두드리던 소리가 탈수 소리였구나

뚜껑을 열자
손에 손잡고 씨름하듯이 허리춤을 부여잡은
식구들이 가장자리로 가지런히 잠을 자고 있다

그래, 서로의 등을 두드려서 하얗게 빛을 내었구나
따뜻한 가슴을 풀어서 세제를 녹였구나
가는 목덜미를 씻겨주며 말끔하게 헹구어 내었구나

아내의 좁은 어깨를 펴서 빨래줄 중앙에 편안하게 앉히고
주름진 내 다리통을 반듯하게 펼쳐서 가장자리에 세우고
매일 식구들 체면을 닦아주던 수건의 네 귀를 꼭 맞추어
가을 국화꽃 향기를 묻혀서 널어놓고

소파 깊숙이 몸을 낮추고 올려다보니
내가 아끼고 사랑하여 왔던 모든 것이 빨랫줄에 있다
(허진년·시인)
+ 빨래를 널면서

우리 집은 가족이래야
네 명밖에 안 되지만

이틀이 멀다 하고
부지런히 세탁기를 돌려야 할만큼

형형색색의 빨래들이
하루에도 수북히 쌓인다

힘든 일은 세탁기가 다하지만
탈수가 끝난 빨래들을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면서
문득 부끄러워진다

나의 속마음을 마지막으로
세탁한 때가 언제였나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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