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6일 일요일

이준관의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 외


<이발에 관한 시 모음> 이준관의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 외

+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햇빛과 바람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턱수염을 밀어주는
이발사가 되고 싶다.

비록 내 가위질은 서툴겠지만,
나귀처럼 가위는
스프링이 낡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들의 삶을
위로해주는 말을
속삭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발소에서
처음 읽었던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허름한 액자에 걸려 있던 시.

삶은 끝내 가난한 그들을 속이고
나도 속였지만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다섯 평 좁은 이발소에
난로를 피우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수증기 뽀얀 유리창 너머
자작나무처럼 하얀 성탄절의 눈을
기다리겠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의 머리를
성탄목(聖誕木)처럼
아름답게 깎고 다듬어주겠다.
(이준관·시인, 1949-)
+ 산골 이발소

팔십 년 묵은 감나무 아래
통나무 의자를 놓고
머리를 깎습니다.

이빨 빠진 기계가 지나간 뒤
더벅머리 깎이는 아이들의 머리는
뒷산에 떨어지는 알밤처럼
여물었습니다.

껄밤송이 같은 아이들이
주머니엔 알밤이 가득
땡감을 깨물면서 머리 깎으러
모여옵니다.
달은 매일 밤 통통 여물어 가고
내일은 추석.

감은 햇볕에 데어 붉었습니다.
밤은 기쁨에 겨워
가슴을 헤치고 여물었습니다.
노란 감나무잎 날리는 바람은
시원해 좋은데,
들지 않는 기계를 놀리느라고
아저씨 이마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열립니다.

깎은 아이 웃고,
깎는 아이 눈물 짜고,
내일은 추석.
오랜만에 부산한 산골 이발소엔
여무는 가을 하늘이
한아름 다가옵니다.
(이범노·시인,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머리 깎는 날

눈물 없인
치르지 못하는 의식

생지옥 같은 날

그놈의
악어 이빨 같은
바리깡
왜 그리 물고 뜯고
지랄인지

아버지는
아이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악어에게 물린 아이는
아프다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겨우겨우 치른 의식

머리는
소 풀 뜯어먹은 듯
울퉁불퉁
불쌍 사납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
머리 깎는 날.
(이문조·시인)

+ 이발소에서

이발사 엄씨는
언제나 무표정입니다.
그가 무차별 휘두르는
예리한 가위의 기세에
잘린 머리가 바닥에
맥없이 뒹굽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웃자란 생각 이상의 생각이나
욕심은 과감하게 쳐버려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단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그는
직시하고 있습니다.
이발사 엄씨는
언제나 냉정합니다.
자를 것은 자르고
칠 것은 쳐버리고
남길 것은 알아서 남기는
그는 오늘도 단호하게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표정 없이 실현합니다.
(양수창·목사 시인)
+ 이발소

머리를 깎는다
실버 이발사는
정성으로 머리를 깎는다
1만원에 나의 머리는 단정하게 된다
나의 머릿속은 1만원으로 단정하게
정신을 정돈하지 못하지만
나의 머리는 1만원으로 정돈을 할 수 있다
(민경대·교수 시인, 1951-)
+ 이발소에서

목욕을 하다가 문득
머리카락을 빡빡 깎아 버리고 싶어진다
탈의실 한쪽 구석에 차려진
이발소 의자에 앉는다
이발사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날선 가위를 거머쥔다
아저씨 머리를 잘라줘요
어떻게 자를까요
나는 빡빡 깎아달라는 말을 못한다
짧게요, 스포츠형보다 짧게요
너무 짧지 않을까요?
아니 괜찮아요
까만 머리카락들이 뚝뚝 수건 위로
떨어진다
끝내 빡빡 깎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내가 밉고 치사하다
회사에 다니지만 않는다면
돈을 벌어먹고 살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카락을 빡빡 깎아버릴 수 있을 텐데
하얀 수건 위로 자꾸 떨어지는
까만 머리카락들을 바라보며 나는
아저씨, 빡빡 깎아줘요
아저씨, 빡빡 깎아줘요
라고 속으로 수도 없이 외친다
(홍영철·시인)
+ 이발理髮을 하면서

늙은 어머니의 손에
가위와 빗을 들게 한 날은
먼 길 떠나는 삭발처럼
내가 새로 태어나는 날이다
배를 열고 머리부터 내밀었던
생의 첫날에 어머니는
또 얼마나 내 머리카락을 치셨는지
고통을 다 베어뜨린 민둥산 같았겠다
어머니의 손에 삭뚝 잘려나간
한 줌 머리카락을 보니
저것이 가슴을 치는 번뇌 같아서
하늘은 그렇게 불현듯 어두워지고
비는 속절없이 그렇게 내렸던 것이다
내 스스로 머리 친 날이
며칠이나 되었을까 되짚어보니
해 가까이 장발로 지낸 적도 있었다
그땐 왜 잡풀 같은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겼는지
무성하게 돋아난 마음 같은 것이라고
어머니, 절집의 주지처럼
무심하게 듬성듬성 베어내신다
터럭 하나 없이
살갗 다 드러내고 싶다고
맨살로 부딪혀 번뜩이며 살아야겠다고
어머니에게 머리 내민 날
서늘한 비바람이 온몸을 적셨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역전 이발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문태준·시인, 1970-)
+ 월남 이발관

산동네를 삼대 째 지키고 있다
창문 너머 면도거품 같은 구름 지나가면
이발사는 하얗게 아침을 부풀린다
어긋난 문틈에서 비어져 나온 삼색 싸인볼은
늘 제자리로 시간을 회전시킨다
머리칼을 움큼 뜯어내던 낡은 바리깡은
그녀가 배웅하던 나트항 항구까지
금방이라도 들쭉날쭉 길을 낼 것만 같다
초침처럼 가위가 째깍거리고
삼십 년 단골은 의자에 기댄 채 잠이 든다
쿵더쿵 바퀴를 움켜쥐던 고향길처럼
사람들 이 곳에서 시동을 꺼뜨리기도 한다
뒷목을 주무르다 올려다보면 천장의 선풍기
우두두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어느새 퀴논 상공에 떠 있다
어디쯤에서 철모를 잃어버렸을까
오랜 편두통처럼 그 자리, 욱신거린다
연탄난로는 연통으로 긴 숨을 고른다
철사줄에 널린 수건에 햇살이 개켜지면
한나절을 데운 연탄재가 가게 앞에 놓인다
날을 벼리며 새운 숱한 밤들,
이발사는 까만 숫돌 위에 물을 끼얹는다
어둠으로 철조망을 두른 골목마다
조명탄처럼 터지는 별빛이 총총하다
(안시아·시인, 1974-)
+ 이발소

모든 여자는 기분이 좋다
더군다나 계급 없는 사랑에
최상의 안락이 있다면야
더 이상 바랄 일이 있으리오
실오라기 만한 털끝 하나도
놓지 않으려는 이 면도사의 애정
그 사랑의 텃밭에서
그윽한 눈을 감는다
희뜩희뜩 산 비탈길로
새치가 날아와 앉는데
(하재일·교사 시인, 1961-)
+ 마을 이발관

가난을 따라 마실 다니듯 했던 이사
언덕으로 사도로 밀려나야 했다
곗돈 바람에 아래층에 이발소도 있고
제법 햇빛을 볼 수 있었는데
가끔 수건 삶는 양잿물 냄새에
흥분하기도 했다
인사 겸 머리 자르러 간 아래층
아주 예쁜 아가씨가 수건을 개고 있고
포마드 냄새가 자욱했다
어떻게 앉았는지 머리는 잘려나가고
예쁜 얼굴만 오락가락했다
몸은 중심 없이 넘어지고
뜨거운 물수건이 얼굴에 덮이고
귓불로 스치는 손길이 틀림없는 아까 그
예쁜 아가씨일 것이다 에 이르자
몸은 어느새 구름 위를 걷고
예리한 칼날보다 더 짜릿짜릿하게 스치는 손
그의 날숨이 나의 들숨으로 들 때
참았던 목젖은 꿀꺽거리고
빨라지는 호흡을 애써 잠 속으로 집어넣으려 할수록
심장은 대숲처럼 와스스 와스스 허우적거렸고
자연의 생리는 딱딱하게 굳어져
온몸이 꼿꼿하게 얼어버렸다
그날부터 흘깃흘깃 훔쳐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차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머리를 자르고 있는 그 예쁜 아가씨와
면도를 하고 있는 남편을 보는 순간
함께 나누었던 짜릿했던 숨이
수염 거칠한 저 남자였다니
달콤했던 아름다운 환상이
시퍼런 면도날에 일순 잘렸다
(오영록·시인, 1959-)
+ 우리 동네 이발사

굽이쳐 돌아가는 산복도로에 어둠이 깔리면
이용원을 알리는 회전등에 불을 켰다
누가 손님으로 올 것인지 기다리지 않지만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초저녁 적막을 털어 내듯
수건으로 의자나 서랍장을 털어 냈다
미세한 먼지는 눈을 기시며
옷장이나 의자 팔걸이에 어느 틈에 자리하고
한순간 틈을 봐 주인행세를 하곤 했다
거울 속에서 단정하게 놓인 가위나 빗, 면도칼이
묵은 손때로 숨을 쉬었다
빛나는 날로 머리를 손질하고 싶은 날이다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남편 곁에서
그의 아내가 면도를 해 갔다
그들 부부는 이용원에서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이제 중년을 넘어서는 고개에서
아침부터 가위를 놓는 저녁까지 함께 하는 것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여느 작은 손님이 왔을 때에도 정성을 다하여 일을 하였다
허리도 아프고 목덜미도 욱신거리지만
한 번도 짜증을 내본 적이 없는 아내 곁에서
손놀림이 늘 가벼웠다
짜증 낸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요금을 지불하고 돌아서 나가는 손님을 취조하듯
어김없이 불러 세워 놓고 손을 벗어나 용케 살아 삐죽하게 솟아오른 가닥을
가위로 골라 가며 허밍을 했다
귀담아 듣지 않으면 모를 작은 노래
그 집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면 한없이 넓은 부산항이 바라다 보인다
(강영환·시인, 195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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