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0일 월요일

이동순의 ´아름다운 세상´ 외


<세상에 관한 시 모음> 이동순의 ´아름다운 세상´ 외

+ 아름다운 세상

이름도
생김새도 다른
참새 비둘기 갈매기들이 한데 어울려
모이 쪼는 광경을 봅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양식 나누는 그 모습이
너무도 어여쁩니다
오갈 데 없이 남루한 흑인 하나가
느긋한 표정으로
먹이 봉지 안고 서서
한 줌씩 천천히 뿌려줍니다
아, 우리가 진정 원하는 세상이란
바로 저런
조화가 아닐까요
(이동순·시인, 1950-)
+ 세상은

돌 지난 딸아이 보드랍고 깨끗한 맨발
그 발로 볼 부비며 느끼고 느끼나니
세상은 그토록 보드랍고 깨끗한 거냐!
네 깨끗함으로 무너지는 하늘을 지켜다오.
(나태주·시인, 1945-)
+ 세상이란 것

가만히 앉았는데
세상이란 것이 떠오른다
지구의로 보면 둥글고
정치로 보면 쑥밭이고
역사로 보면 불쌍하고
나를 보면 벌레 먹은 잎새 같다
나를 왜 평가절하하느냐
조금 동정받는 것이 사랑받는 듯해서
어떤 땐 사랑에 굶주린 늑대 같아서
(이생진·시인, 1929-)
+ 쓸쓸한 세상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도종환·시인, 1954-)
+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

두 눈을 꼭 감고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세요.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소리를 들어보세요.
귀로 안 들리는 소리도
아주 잘 드립니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만져 보세요.
차가운 돌들도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느껴 보세요.
이 세상 모두가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윤은기·시인)
+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네요

등이 가려운데
손이 닿질 않는다

내 몸에 내 손이 닿질 않는 곳이
있다는 건
더불어 살라는 조물주의 계산

앞으로브라가
훨씬 편리할 것 같은데
잘 팔리지 않는 걸 보면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보네

나는 널 돕고 너는 날 돕고
서로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깊은 뜻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네요.
(이문조·시인)
+ 이 세상에 없는 필수품 다섯 가지

이 세상에는
도망쳐 숨을 곳이 아무 데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편히 쉴 곳이 마땅치 않데요.

이 세상에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사는가 죽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데요.
(강월도·시인, 1936-2002)
+ 조그만 세상

마당 모퉁이에
새끼 하마 모양을 한 바윗덩이가
머리를 땅에 박고 있다
목 위엔 깊게 파인, 세 뼘이 넘는 상처 자국
젖으면서 마르면서
제 몸빛으로 거의 아물어 있다
깊은 상처였을 그곳에
오가는 바람들이 떨구고 간 흙먼지 모아
일구어낸 텃밭
풀꽃 몇 개 앉아 있다
새끼하마 다리 아래로
알로에 뿌리가 서로 고리를 이어 떨어지지 않은 채
연하고 작은 잎들을 피어올리며
제 집 마련에 바쁘다
담쟁이 넝쿨 몇 가락은
붉게 힘줄을 돋으며 그 등을 오르고 있다

제 몸을 다 내어준 새끼 하마 바위
그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와 눈을 맞추고 싶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는다
머리를 땅에 박고 상처를 잊은 듯
한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덤으로 환하게 얹혀 있다.
(유봉희·시인)
+ 내가 바라는 세상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
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들이 길 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욱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요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입니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상 가에 모여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빛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 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입니다
(이기철·시인, 1943-)
+ 그런 세상

청소부의 월급봉투가 구청장의 것보다 더 두둑하고,
근로자의 승용차가 사장의 것보다 더 고급일 수도 있는 그런 세상.

국회의원 입후보자가 없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입후보자 모집 가두 캠페인을 벌이는 그런 세상.

아침마다 신문이나 방송의 톱뉴스는
예술인들의 신작 발표 행사로 장식되는 그런 세상.

노인이 되어도 서럽지 않은, 아니 노인이 빨리 되고 싶어
머리를 허옇게 탈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어른들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

대통령의 연두교서, 법원의 판결문, 국회에서의 질의응답,
모든 법전들이 시로 이루어진 그런 세상. (시를 모르는 자들은 참 괴롭기도 하리)

은행원들이 대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보너스를 걸고 선전하는 그런 세상.

하루에 2시간 수업, 나머지는 여행으로 학점을 따는 그런 학교만 있는 세상.

전철의 선반에 두고 내린 물건이 한 달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세상.

울타리가 없는 세상.

경찰관들은 할 일이 없어 매일 낮잠이나 자고,
교도소는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국영호텔로 개조되어 가고 있는 그런 세상.

그리고 참,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임보·시인, 194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신현정의 ´야 단풍이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