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권오삼의 ´발´ 외


<발에 관한 시 모음> 권오삼의 ´발´ 외

+ 발

나는 발이지요.
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
하루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
때로는 바보처럼
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

그러나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
김정호 선생의 발.
아우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누나의 발.
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던
김좌진 장군의 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발.

그러나 나는,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고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이지요.
(권오삼·아동문학가, 1943-)
+ 웃는 발

동생 발을 씻겨준다.
미끈미끈 비누칠을 하니까

간질간질 까르르
발가락도 꼼지락거리며 웃고

뽀글뽀글 뽀르르
거품들도 웃다가 배 터진다.
(함기석·아동문학가)
+ 빗방울의 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보아도
나는 알지.

빗방울 방울마다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발 한 개씩을 달고 있다.

또닥또닥, 똑똑똑, 탁탁탁,
투덕투덕........
말소리.

드디어 증거를 찾아냈다!

화분 궁둥이 궁둥이마다
흙이 잔뜩 튀었다.
비 온 지난 밤 사이
발로 탕탕탕 물탕을 튀기며
돌아다녀서.

맨발로 탕탕탕
돌아다녀서.
(이상교·아동문학가, 1949-)
+ 발톱

아주 느릿느릿 지나가는
시간이 여기 있었구나.
내가 까맣게 잊고 있는 사이
뭉그적뭉그적거리던 나의 게으른 시간들이
길어진 발톱 속에 집을 짓고
꾸역꾸역 까만 때로 모여 있었구나.
고린내를 풍기며 드렁드렁
코를 골고 있었구나.
하얀 비누 거품에 세수하고도 깨어나지 않던
게으른 녀석들이
요놈들!
손톱깎이를 갖다 대니, 톡!
화들짝 소스라쳐
달아나는구나.
(신형건·아동문학가, 1965-)
+ 신발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내 신발이 말했다
발아, 미안하다

내 발도 말했다
신발아, 괜찮아?
너도 참 아프지?
(정호승·시인, 1950-)
+ 발

이렇게 발 뻗으면 닿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늘 거기 계시니까요
한번 발 뻗어보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마음먹습니다
당신이 놀라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발 뻗어보지 않으면 당신은 또 얼마나 서운해하실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발 뻗어보려다 그만두곤 합니다
(이성복·시인, 1952-)
+ 아내의 맨발 - 갑골문 甲骨文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송수권·시인, 1940-)
+ 발가락

꼼질거리는 발가락이 오늘도 맨 아래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다.
단 한번도 호사를 모르는 발가락은
내가 가라면 가고
내가 오라면 오는
순종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처음부터 태어났던 모양이다.

오늘도 이유를 모르는 뜀박질을 하는 발가락은
온통 땀이 흥건하다.
온통 악취가 흥건하다.
길바닥은 혼탁한 매연에 숨쉬기가 버겁고
무심히 버려진 양심들이 겹겹이 쌓여
두 눈으로는 참아 건너지 못할 곳을
묵묵히 걷고 있다.

처음 누워있는 나를 일으키더니
이제는 앞을 향해 가라한다
이제는 앞을 향해 뛰라한다
그렇게
무언의 든든한 후원자는 오늘도
최후의 밑바닥에서 열심히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
(김노인·시인)
+ 사람 발길이 길을 낸다

태초부터 길이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오고가며
새로운 길을 만든다.
아무리 우거진 숲 속이라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
혼자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제 마음의 담장을 허물고
의사소통의 길을 내라!

고독한 철학자보다는
꿀. 꿀. 꿀 어울려 사는
돼지가 더 행복할 수 있다.
세상은 어차피 시궁창이니

내 잘못 네 잘못 선을 긋지 말고
더불어 안고서 어울려 보자.
어울렁, 더울렁. 한 세상인데
희면 어떻고 검은들 어떠리?

가지 못한 길 하지 못한 행동
두렵고 어색하고 힘들지라도
한순간의 용기가
평생의 친구를 만든다.

내 마음에 무성한 잡초들
말 그 미 걷어내고 길을 내자!
인생 구십 아침이슬인 것을
소고집불통에 늙어만 간다.
(牛甫 임인규·시인)
+ 어머니 발톱을 깎으며

햇빛도 뼛속까지 환한 봄날
마루에 앉아 어머니 발톱을 깎는다

아가처럼 좋아서
나에게 온전히 발을 맡기고 있는
저 낯선 짐승을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싸전다리 남부시장에서
천 원 주고 산 아이들 로봇 신발
구멍난 그걸 아직도 신고 다니는
알처럼 쪼그라든 어머니의 작은 발

그러나
짜개지고. 터지고, 뭉툭해지고, 굽은
발톱들이 너무도 가볍게
툭, 툭, 튀어 멀리 날아갈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봄이라서 더욱 화가 난다
저 왱왱거리는 발톱으로
한평생 새끼들 입에 물어 날랐을
그 뜨건 밥알들 생각하면
그걸 철없이 받아 삼킨 날들 생각하면
(유강희·시인, 1968-)
+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문태준·시인, 1970-)

+ 발바닥으로 읽다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낸다
고무통 수북히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두 발로 더듬는다
삶에 찌든 내가 밟힌다
먼 기억 속 부드러운 섬모의 숲을 거슬러 오르자
작은 파문 일렁인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행간
지난 날 부끄런 얼굴, 밟히며 밟히며
자백을 한다
좀체 읽히지 않던 젖은 문장들
발로 꾹꾹 짚어가며
또박또박 나를 읽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모란꽃 젖은 물기를 털어 낸다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꽃을 읽고 날아간다
(조경희·시인, 충북 음성 출생)
+ 아내의 발

어젯밤 과음으로
목이 말라
새벽녘 잠 깨어 불을 켜니

연분홍 형광 불빛 아래
홑이불 사이로
삐죽 나온 아내의 발

내 큼지막한 손으로
한 뺨 조금 더 될까

상현달 같은
새끼발가락 발톱
반달 모습의
엄지발가락 발톱

앙증맞은 그 발로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아내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군데군데 제법 굳은살이 박힌
235밀리 작은 발

그 총총 걸음마다
행운과 복이 깃들이기를....
(정연복, 1957-)
+ 봄

늘 수수한
모습의 당신이기에

입술에 진한 루즈를 바르거나
손톱에 매니큐어 칠한 것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곤한 잠에 떨어진
당신에게
이불을 덮어 주다가

불현듯
나는 보았네

연분홍 매니큐어
곱게 칠한 너의 발톱

어쩌면 이리도 고울까
마치 꽃잎 같애

진달래처럼
라일락처럼

너의 작은 발톱마다
사뿐히 내려앉은 봄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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