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상투적 신앙´ 외 12편의 시


<김상현 시인 신앙시 모음> ´상투적 신앙´ 외 12편의 시

+ 상투적 신앙

내 영혼이 그럴 거다
세탁물처럼
때 찌들어 허물 벗듯
맡겨지는,
옷은 세탁소 기름통 속에서
숨도 못 쉬고 돌고 돌아
때 구정이 빠질 때에야
거의 질식한 상태로 꺼내진다.
교회당에 앉아 있던 나,
그토록 알몸이 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모태로부터 지금까지 버릇되어버린
찬송과 회중기도와
뜻 없이 외우던 주기도문
아, 번질거리는 나의 기름때여!
+ 잠들기 전에 하는 기도

나뭇잎에 아침이슬 맺듯
자고 나면 내게도
이마에 맑디맑은
기쁨 서리기를

아직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 꽃비노을

붉은 꽃이기를
꽃이었을 때 눕기를.
+ 풀잎의 열매

아가야
풀잎 끝에 대롱거리는 이슬방울은
물방울이 아니란다
풀잎의 열매란다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라는 풀잎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기에
잠시지만 세상에서 가장 영롱한 빛깔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란다
세상에서 천대받은 식물이라서
가끔은 열매 맺도록
하나님도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란다.
+ 오늘 내가 바라보는 별

오늘 내가 바라보는 별은
인도 히말라야 산에서 사는
소녀도 바라볼 터

지난여름
지나치듯 찍은 사진 한 장으로
기억 속에 크게 자리 잡은
눈이 검고 맑은 소녀,
별을 보면 서로 통할 수 있을 터

오늘 내가 바라보는 별은
인도 히말라야 산에서 사는
소녀에겐 아름다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 같을 터.
+ 초록의 4월

푸른 숨결이네
스스로 이는 참회의 바람이네
어린 손의 손짓이네

어린 손들이 하늘을 떠받치며
환호하는 감사,
겨울 내내 눈물로 퍼 올린
모세혈관의 힘겨움을 참아내
저곳들을 싹틔웠을
어머니에게 바치네

하늘의 계시를 기다리고 있는
옹골찬 초록의 세상을 만드네.
+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젖을 물고 있는 어머니의 품속,
바람에 날린 씨앗이 떨어진 자리,
그 생명이 움트는 자리,
개망초꽃 핀 자리,
낙엽이 뒹군 자리,
풀벌레 울던 자리
내 사랑이 앉았다 돌아간 자리,
다시 돌아와 기다리는 자리

이 같은 아름다운 자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자리.
+ 어떤 여가

영전을 축하한다며
누군가 보내온 값나감직한 양란화분
나 그 자리 짧게 있다 물러난 것처럼
화려한 꽃 화급하게 진 뒤
화분 올려놓았던 자리
창틀 시멘트 틈새
푸른 이끼 위에
아무도 모르게
민들레 샛노란 꽃
두어 송이 피어
밖과 안, 하늘과 집
시간과 시간
생각과 생각
사이에 다리를 놓고
나를 한없이 평화롭게 한다

하나님이 보내온 들꽃 두어 송이.
+ 민어나 숭어처럼

숭어가 가장 어렸을 때는 모치라고 부르고
좀 더 자라면 참동어라고 부르고
그보다 더 자라면 홀떡백이라고 부른다
민어의 어렸을 적 다른 이름은 감부리,
좀 더 자라면 통치라고 한다

나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버린 적이 없이
날마다 허락해 주신 새 날을
그저 그 날이 그 날이거니 하며 살면서도
부끄럼을 몰랐다

더 넓은 곳을 향해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면서도
게으름인 줄 몰랐다

이제라도
누가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다오
전혀 다른 삶에 도전할 수 있도록
제발 나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다오
숭어나 민어처럼.
+ 자범죄

아내가 바지를 다림질하면
꼭 주름이 세 개쯤 생긴다
난 외줄주름이 아니라고 투덜거리지만
속내가 찔끔하다
딴눈 판 내 삶을
들켜버린 것
같아 찔끔하다

아내가 다림질할 때는
영락없이 기도하는 자세다
수없이 번민하는 내
삶을 위로라도 하듯
경건해 뵌다

아내가 바지를 다림질하는 것은
혹 다른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다시 주름투성이인 바지를
묵묵히 펴고 있는 것은
매일 매일을 용서하는 하나님처럼
형편없이 구겨진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 살해되는 꽃

교회당
강단 위의 실신한 꽃송이들,
단두된 꽃들은 일요일이면 고통을 당한다

개울가의 창포,
들판의 소국,
갯가의 갈대,
죄 없는 꽃들은 예수 마냥 끌려와
피를 흘리며 신음한다

누가 꽃의 죽음을 환호하는가
꽃은 꽃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제 주어진 삶을 살면 그만인데
꽃은 까닭 없이 살육 당해 수반에 꽂혀있다

이 화려한 주검 앞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를 듣는
일요일 아침.
+ 거대한 병동

지구는 거대한 병동이다
이 병동에선 결코 살아남지 못 한다
병든 소, 병든 닭, 오리, 병든 돼지,
어디 병든 것이 가축뿐이더냐
에덴 이후, 사람 가까이 있는 것 중에
병들지 않은 것이 있었더냐
+ 참깨를 털며

텃밭에서 거둔 참깨를
어머니와 함께 털면서
한해 내내 식탁에 오를
참기름의 고소한 맛을 생각하니
행복해진다.

이처럼
훗날 하나님이 나의 열매를
요구하실 때
나는 얼마나 향기 나는 진실을
털어 드릴 수 있을까?
(김상현·시인, 1947년 전남 무안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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