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겨울나그네 -김재진-

비오는 밤 편지를 쓴다.
키보드 두드리는 전자 우편 아닌
만년필로 써나가는 고전적인 노동,
노동하듯 나는 네게
힘들여
사랑한다는 한 마디 하고 싶다.
사랑한다.
잘 못 걸려온 전화처럼 수화기 내려놓으며
나 이제 너를 향해
한 통의 전화조차 할 수 없지만.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려오는 네 음성 듣고서도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바깥에는 비 내리고
나는 지금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처음 본 지붕과 낯선 길들
끈질기게 따라온 절망을 버리기 위해 나는
정류장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쉴 새 없이 물건을 사고,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말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듯
혼자 있는 방에서도 지껄였다.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말을 하고,
아무도 읽어주는 이 없는 글을 썼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듯 확인하는 일,
한때 네가 확인하던 내 마음처럼
두드리고 만져보는 일,
눈 대신 바깥에는 비 내리고
아무 것도 더 확인할 것 없는 너를 향해 나는
쓰고는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쓴다.
전화조차 할 수 없는 너,
사랑한다는 말이 죄가 되는 너,
나는 너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