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이상윤의 ´아이에게´ 외



<아이에 관한 시 모음> 이상윤의 ´아이에게´ 외

+ 아이에게

아이야, 너는
하루에 얼마만큼이나
네 반짝이는 눈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흐르는 시냇물에
작은 발 깊이 담그고
굴러가는 모래알에 깜짝깜짝 놀라며
소리내어 웃어 본 적은 있니?
어쩌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한두 포기 혹은 무더기로 피어나
바람에 살랑이는 들꽃들
그들 곁으로 한 발자국 더욱 가까이 서서
다정스레 그 이름 불러 준 적이 있니?
그리고 그 자리, 비록 작고 작은 것들이지만
밤마다 목을 뽑아 네 창문 고요히
두드리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
귀기울여 들어준 적이 있니?
네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어쩌면 차라리 잊고 지내도
하늘은 언제나
네 이마 위에서 푸르고
맑은 시냇물은 발 밑에서 끝없이 흘러가고
들꽃들은 멀리서도 그 작은 귀를 열어
네 목소리를 알아듣는단다.
이 너른 우주에 존재하는
참으로 모래알처럼 작은 것이라도 모두가
너의 목숨처럼 빛나는 소중함이란다.
마치도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는
보이지도 않는 분이
그 커다란 눈과 귀로 너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서로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것까지도
잘 닦여진 거울 보듯 깨끗이
알고 계시듯이 말이란다.
너, 아이야.
(이상윤·시인, 경북 포항 출생)
+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숲이 눈부신 것은
파릇파릇 새잎이 눈뜨기 때문이지
저렇게 언덕이 듬직한 것은
쑥쑥 새싹들이 키 크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도랑물이 생기를 찾는 것은
갓 깨어난 올챙이 송사리들이
졸래졸래 물 속에 놀고 있기 때문이지
저렇게 농삿집 뜨락이 따뜻한 것은
갓 태어난 송아지, 강아지들이
올망졸망 봄볕에 몸부비고 있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새잎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새싹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다시 오월이 찾아오고
이렇게 세상이 사랑스러운 것은
올챙이 같은, 송사리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송아지 같은, 강아지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오인태·시인, 1962-)
+ 아이야!

아이야!

너는
외로워 말라
괴로워 말라

너는
슬프지 말라
아프지도 말라

너만은
항상 기뻐해라.
꿈속에서도 즐거워해라.

너만이라도
사람의 말은 하늘에 아뢰고
하늘의 말은 사람에게 전하며

생글생글 웃는 아이야!
누가 뭐래도
지금처럼
하늘의 꽃으로 한 생을 살아라.
(권정순·시인)
+ 내가 만일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도마뱀을 따라 꽃밭으로 가 보고,
잠자리처럼
연못에서 까불대고,
물 위에 뱅글뱅글
글씨를 쓰고,
그렇지, 진짜 시(詩)를 쓰지.

아침나절에는
이슬처럼 눈을 뜨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매미가 되어 숲으로 가지.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상 앞에 붙었을 줄 알아.

책에 씌인 것은
벽돌 같은 것.
차돌 같은 것.
그렇지, 살아서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그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지.

내가 만일 너라면
조잘대는 냇물과 얘기를 하고,
풀잎배를 타고,
항구로 나가고,
무지개가 뿌리 박은
골짜기로 찾아가 보련만.

이제 나는
도리가 없다.
너무 자라버린 사람이기에.
어른은 어른은

참 따분하다.
그렇지, 내가 만일 어린 소년이라면
나는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박목월·시인, 1916-1978)
+ 어린애들

정오께 집 대문 밖을 나서니
여섯, 일곱쯤 되는 어린이들이
활기차게 뛰놀고 있다.

앞으로 저놈들이 어른이 돼서
이 나라 주인인 될 걸 생각하니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본다.

총명하게 생긴 놈들이
아기자기하게 잘도 놀고 있다.
그들의 영리한 눈에 축복이 있길 빈다.
(천상병·시인, 1930-1993)
+ 매실나무

매실나무 새로 난 가지 가느단 가지는
내 손가락 같고

매실나무 묵은 줄기 굵다란 줄기는
아빠 팔뚝 같다

아빠가 두 팔로 힘껏 나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듯이

굵다란 줄기가 가느단 가지를
쑥쑥 쑥쑥 밀어 올린다
(이안·시인, 1967-)
+ 빵집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이면우·시인, 1951-)
+ 아이들의 손

네덜란드 아이와
흑인 아이와
중국 아이가
놀이를 하면서
진흙 속에 손을 넣는다 -
어서 말해 보아라, 어느 것이
누구의 손인지
(한스 바우만·독일 작가, 1914-1988)
+ 이 다음에 너는

엄마가 너의 등을
두드려 주듯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마음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어라
널 안고 있으면
내 마음 빈틈없이 차오르듯
눈빛 하나,
말 한마디로
이 세상 가득 채우고
지금 널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처럼
그렇게 세상을 보아라
들숨 날숨으로
고운 마음 엮어서
오래도록 은은한
향기가 되어라
(최옥·시인)
+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박성우·시인, 1971-)
+ 잠지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 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운 밥 얻어먹겠네
(오탁번·시인, 1943-)
+ 벌거벗은 아이들

화가 이중섭 선생님은
우리나라 소와 함께
아이들을 많이 그리셨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아이
거꾸로 선 아이
게에 물린 아이
이상한 아이들만 그리셨어.
바닷가에서 장난치는 아이
꽃밭에서 뒹구는 아이
노는 아이들만 그리셨지.
아이들은 노는 것도 따분한지
훌러덩 옷을 벗었어.
점잖지 않게
고추도 달랑달랑
선생님은 누구도 나무라지 않으셨지
선생님 그림 속의 아이들은 모두 벌거숭이야.
(고광근·시인, 1963-)
+ 노근이 엄마

내 가장 친한 친구
노근이 엄마가
지하철역 남자 화장실
청소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부터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오줌을 깨끗하게 눈다.
단 한 방울의 오줌도
변기 밖으로 흘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노근이 엄마가
원래 변기는 더러운 게 아니다.
사람이 변기를 더럽게 하는 거다.
사람의 더러운 오줌을
모조리 다 받아주는
변기가 오히려 착하다.
니는 변기처럼 그런 착한 사람이 되거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정호승·시인, 1950-)
+ 난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나이 많고 빈 병 같은
어른들은 싫어.

어린 나이에
모르는 걸 배우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나라를 위한다면서
내 주장만 내세우고
내 욕심만 차리는
거짓말투성이 어른들은 싫어.

동무끼리 다정하게 공부하면서
배고픈 동무들을 걱정해 주고
밥 한끼 나눠 먹는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걸핏하면 웅성웅성
데모하는 어른들은 싫어.
오순도순 사귀면서
지혜로 자라는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두 동강 난 우리 나라
통일 못 이루고
형제끼리 맞서는 어른들은 싫어.

금강산 마을
제주도 섬마을

서로서로 손잡고 노래부르는
어린이가 난 좋아.
(이정훈·시인)
+ 고추밭

어머니의 고추밭에 나가면
연한 손에 매운 물든다 저리 가 있거라
나는 비탈진 황토밭 근방에서
맴맴 고추잠자리였다
어머니 어깨 위에 내리는
글썽이는 햇살이었다
아들 넷만 나란히 보기 좋게 키우셨으니
짓무른 벌레 먹은 구멍 뚫린 고추 보고
누가 도현네 올 고추 농사 잘 안 되었네요 해도
가을에 가봐야 알지요 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하여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안도현·시인, 1961-)
+ 산골 아이들

이 아이들
자기들 담임선생과 함께 걷고 있는 나를
에워싸고 핼끔핼끔 쳐다보다가도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깔깔대며
천방지축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이 아이들

이 아이들
낯선 사람을 보면
그가 무슨 친절이라도 베풀면 그 길로
지서에 달려가 신고하는 아이도 있다 이 산골 아이들

이 아이들
집에 가면 어른처럼 일을 하고
갓난아이 보다 얼러 잠재운다
이 아이들
그 얼굴 아직은 함박꽃 같은 웃음뿐이고
그 손은 아직 고사리손인 이 아이들
저만큼 쪼르르 빗속으로 달아난다
저마다 메밀꽃 뽑아 한 손에 모아
그래도 선생님과 나에게 내밀고
부끄러워 부끄러워 밤송이 같은 뒷머리 뒤로하고 달아나는 이 아이들

무엇이 될까 이 아이들은 커서
나이 사십에 구부러진 허리
죽으면 죽었지 서른 다섯에 아직 장가도 못 가는 이 산골에서
무엇이 될까 그러면 이 아이들 도시로 가서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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