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선소리

눈 먼 사람인 내가
한밤을 걸어가게
붉은 나리꽃 한 송이 꺾어 들었다
길도 아닌 길을 나서는데
누군가 나를
수심 깊은 절벽 아래
허공 깊은 벼랑 아래
마음의 폐허가
대처럼 쑥쑥 자라나는
천길 낭떠러지로 밀어뜨리는구나
너를 붙잡고
수유(須臾)처럼 살겠다고
썩은 나뭇가지 같은
생(生)의 한 허리 꺾어 분질렀건만
이 여름
폭염의 장례식이 끝난 뒤
나를 하관시켜다오
세상 밖으로
조용히 나를 내쫓아다오
아무도 찾지 않을 곳에
내 무덤을 만들어다오
내가 들어가
목숨 같은 너를 낳을 곳이니
회 섞인 나를 밟으면서
내몸을 짓밟으면서
자진육자배기로
선소리 옥설가를 불러다오
장구 치며
한두 장단 내가 먼저 메길테니
너는 소고로
뒷소리를 계속 받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