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일 일요일

임보의 ´당신의 가치´ 외


<세상 시 모음> 임보의 ´당신의 가치´ 외

+ 당신의 가치

한 사내를 굴리는 것은
여인들의 젖통이고

한 나라를 굴리는 것은
간신배들의 권모술수다

갈채에 싸인 유명한 인물들?
천하를 농치는 아첨과 비굴

지상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속물들의 힘이다

그래도 아직 세상이 덜 무너진 것은
멍청한 당신이 버티고 있기 때문
(임보·시인, 1940-)
+ 이 세상

이 세상 살아가는데
꼭 천재라야 하고
이 세상 죽어가는데
꼭 사리(舍利)라야 하나

천재가 아니더라도
남을 종교처럼 사랑하고
사리가 아니더라도
날 모래처럼 평범하게 놔두는 지혜
그것이 내 천재 아니던가
(이생진·시인, 1929-)
+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그리고 억울해서
세상의 반대쪽으로 돌아앉고 싶은 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날
내게 있었소
아무한테서도 잊혀지고 싶은 날
그리하여 소리내어 울고 싶은 날
참 내게는 많이 있었소
(나태주·시인, 1945-)
+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살자

남모르게 꽃피우는 자연 속에서
하늘의 뜻에 따라 살면서
나보다 못한 이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모으고 쌓느라 괜한 힘 낭비 말고
남에게 받기를 즐겨하기 보다는
작은 것도 나누며 살아가는 마음.
큰 동네를 만들고 살자
(김갑진·시인, 1946-)
+ 버리는 세상이 아름답다

이 세상 욕망의 짐을
조금만 던져버리면
들꽃보다 가벼운 것을
세상 재물 짐을 받을 수 있는 기쁨보다
줄 수 있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
이렇게 행복하거늘
세상 명예 짐은 올라갈 때 힘들고
내려올 때 더 힘들다는
그 사실을 알면
나비보다 가벼운 몸이 되는 것을
이렇게 모든 것을
조금만 더 버릴 수 있다면
하늘에 푸른 별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을
(美石 김정호·시인, 1961-)
+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이룬다는 것은
너와 나의 행복도 소중하지만
온 인류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아름다운 세상이란
사소한 느낌과 느낌으로 어우러진
인간적인 따뜻함도 필요하지만

하늘과 땅 나무와 꽃 새들 돌 하나
그들조차 소홀할 수 없는 헤아려야만 하는
가난한 이웃들
세계 평화를 위한 균형 감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아름다운 세상이란
나와 너의 이익과 감정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나라를 염려하며
절제된 삶을 살아갈 때
넓게는 개인의 인생 또한 잘 살았다고
훗날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
세상의 중심인 나부터...
(나명욱·시인, 1958-)
+ 세상 살기

바람 부는
언덕에 홀로 일어나
세상을 향해
이제 무엇을 하랴

외로운 허공과
정다운 이야기 나누고
하늘을 향해 힘껏 달리며
내 영혼에 사랑의 꽃 심으리

이 세상을 누가
외롭다 하였는가
이 세상을 그 누가
좁다고 하였는가

이토록
외롭지 않은 꽃밭인 것을
이렇게
좁지 않은 들판인 것을
오, 살며사는 나의 나날들이여

오, 나의 생명, 생명이여
(최해돈·시인, 1968-)
+ 낯설어진 세상에서

참 이상도 하지
사랑하는 이를
저 세상으로
눈물 속에 떠나 보내고

다시 돌아와 마주하는
이 세상의 시간들
이미 알았던 사람들
이리도 서먹하게 여겨지다니

태연하기 그지없는
일상적인 대화와
웃음소리
당연한 일인데도
자꾸 낯설고 야속하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토록 낯설어진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할까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잊으면서 산다지만
다른 이들의 슬픔에
깊이 귀기울일 줄 모르는
오늘의 무심함을
조금은 원망하면서

서운하게
쓸쓸하게
달을 바라보다가
달빛 속에 잠이 드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아름다운 세상에 티끌 같은 나 하나

말 한마디 하기가 두렵습니다
글 한 줄 쓰기가 두렵습니다
겨울나무 가지 끝에 팔랑팔랑 소리날 듯
별들이 걸렸는데
어찌나 겨울하늘 아름다운지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 만나 그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길이 바르게 가는 길이라 믿어
뒤돌아보지 않고 오랜 날을 왔습니다
강물도 언 살을 서로 섞은 채
어두운 곳을 저희끼리 몰려갑니다
저녁때는 물오리떼 작은 발도 씻어주고
손 흔드는 갈대풀과 소리치며 떠들기도 하더니
아무도 없는 곳을 묵묵히 감돌아 갑니다
외롭다 말 안하고 오래오래 젖어서 갑니다
우리도 작은 불 켜들고 자갈길 가다가
앞서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 보며 분노합니다
여기저기 어두운 곳에 버려진 말들을 주워들고 흥분합니다
그러다 별밭을 올려다보며 두려워집니다
나도 또한 바르게 사는지 두려워집니다
우리가 가는 발자국 위에 길을 내며 따라오는
언제나 우리보다 더 올곧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손끝이 시린 강바람 헤치며
뒤돌아보지 않고 이 길을 가지만
아름다운 세상에 티끌 같은 나 하나 두렵습니다.
(도종환·시인, 195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