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정구찬의 ´라면을 끓이면서´ 외


<라면에 관한 시 모음> 정구찬의 ´라면을 끓이면서´ 외

+ 라면을 끓이면서

물을 데운다
라면을 끓일 요량으로
봉지를 뜯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이 한때
허기진 오후,
외출 중인 아내의 빈자리가
공복처럼 쓰리다.

멀리 낮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냄비엔 물이 끓고
가지런히 누운 대파를
숭숭 썰어 넣는다.
잘 익은 김치를
밥상 위에 올리면
더 이상 부러울 것 없는 시간

사람들아,
무지한 식욕을 부끄러워 말자
산다는 것,
정말 산다는 것은
허기를 다스리는 일
권력도 富도
라면 한 개의 포만감보다
못한 것을.
(정구찬·시인)
+ 라면·1

쉽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작고 은빛 나는 법랑냄비에 라면을 삶는다.

세상 사는 재미도 함께 끓여보면 어떨까?
뜨거운 라면가락 속에 살다 얻은 슬픔을
녹여 담을 수 있다면 매운맛 수프는
뿌리지 않아도 되겠지.

그대의 깊은 잠 虛氣와 함께 라면 한 그릇
맛있게 비우고 돌아설 때 나의 꼬이고
비뚤린 일상은 풀려나고……
(김리영·시인, 1959-)
+ 라면

양파 송송 썰고
신김치 숭숭 썰어
끓는 물에 풍덩 잠수시켜서
사리수프 넣고 설설 끓이다
치즈 한 조각 살짝 얹고
친구가 준 오리알 하나
후르륵 풀어넣고
냄비뚜껑을 닫는다.

내가 내 의지대로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라면 끓이는 일밖에 없다.
넣고 싶은 대로 넣고
끓이고 싶은 만큼 끓이고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그렇게 자유롭다.

´스트로가노프´를 먹을 때나
´믹스 파스타´를 먹을 때는
분위기를 잡아야 하고
입 언저리도 정결하게 해야 하고
품위도 지켜야 하는데
범생이에게는 갑갑한 일이다.

사는 일도 폼을 잡으려면
가려야 할 것 많아 답답하고
냄비뚜껑을 받치고
툇마루에 쪼그려 앉아
후루룩대며 먹는 오뚜기 열라면이
차라리 솔직하고 담백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꽃등심 집에서는
우아한 인생들이
우아한 얘기들만 하고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을까 말까
고민중이다.
(김낙필·시인)
+ 라면을 먹기 전에 쓴 시

나뭇잎 하나 보려고
산으로 간다
나뭇잎 하나에 둥그러이 고인
물방울 하나 보려고 산으로 간다
아아, 우리가 늘 잊고 사는
나뭇잎과 물방울 속에
파르르 떨고 있는
산새의 두 눈동자
그리고 먼 옛날과
보이지 않는 먼 우리들의 미래!
그러나 누천년을 달려가야 할
우리들의 등불과 같은 나뭇잎과 물방울!
(김준태·시인, 1948-)
+ 詩人과 라면

이 맛이 아니야
언젠가 누구에게 얻어먹은 라면 맛을 기억하는 시인
그 기막힌 맛을 찾아
오늘 아침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려,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떠올리듯 끓인 라면이
이름값 못하는 싱거운 莘라면이라
실망이다, 시인은
달걀 하나 풀어 시린 속 얼큰하게
공복의 아침을 넘기리라 생각했는데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책장만 넘어가고

김 서린 안경, 유리알 속으로
꼬불꼬불 살아온 날들이 불어터진다
너무 싱겁게 살아왔어, 중얼거리듯
국물을 마시며 파김치 하나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맵고 짜게, 쫄깃쫄깃한 詩 한 줄을 위해
시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의 모습이 낙엽처럼 고독하다
수프 색을 닮은 낙엽,
창밖엔 낙엽이 지고 있었다
(유정탁·시인, 1968-)
+ 라면을 먹으며

라면을 먹으며
인생을 돌아본다

수없이 꼬여있는 라면발
꼬여버린 내 인생

무심코 채워버린
첫 단추
운명의 매듭

이젠 너무 멀리 와버려
되돌아가
다시 채울 수도 없구나.
(이문조·시인)
+ 라면을 먹으며

돌아앉아 라면을 먹습니다
밖에 비 쏟아지고 천둥 우를우르를 치는 밤
문득 허기가 졌나 봅니다
문득 식욕이 돋아났나 봅니다
세상일과는 아주 무관하게
여백처럼 앉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등 뒤에서 폭우는 더 거세게 나오고
그것보다 더 큰소리를 내며
돌아앉아 후루룩후룩 라면을 먹습니다
식어가며 몸집 부푸는 욕망이 마음에 들어
국물까지 들이키니 기어이 눈물납니다
나를 그립게 두지 않으려고
이 밤, 내 안의 서러운 구석구석마다
뜨거움 휘휘 풀어놓습니다
(박윤규·시인, 1963-)
+ 양은냄비와 라면

불 방석 깔고 앉아
무시로 시달려 온 세월
미끈했던 엉덩이 노란 피부도
검버섯이 피었구나,

심지가 얕아 쉽게 열에 받혀
울화로 그을린 뱃속
아로새겨진 수평선은
너와 나의 눈대중 약속

으스러질망정 풀리지 않게
오래 전에 작정하고 끌어안아
꼬불꼬불 굳어버린 고집불통
맛깔스럽게 풀어놓는 네가 사랑스럽다

상투 잡아 뚜껑 잦혀들면
콩 튀듯 하는 성깔 팍 수그려
허기진 입맞춤에도 덴 적 없는 나의 입술
오늘따라 너의 사랑이 유달리 쫄깃쫄깃하다
(권오범·시인)
+ 라면을 끓이다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 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이재무·시인, 1958-)
+ 흰 국화 한 다발과 라면 한 봉지

흰 국화 한 다발
가슴에 들쳐 안고
너를 찾아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라면 한 봉지를 샀다

라면 한 봉지 달랑달랑 거리며
산 중턱을 오르다
눈에 익은 곳이 보이자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려간다

눈물은 흘리지 않기로 한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땅을 적시면
눅눅해진 땅에 네가 한기를 느끼진 않을까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하늘을 본다

말없이 국화 꽃잎
오른손 한가득 훑어내어
여기저기 숨어 있는 너에게
이불처럼 덮어 주고

네가 심심할 때 오독오독 씹어 먹던
라면 한 봉지 잘게 부숴
내가 오지 않는 동안 심심해할까
여기저기 뿌려도 준다

갑자기 인사도 없이
숨이 턱까지 차도록
산을 달려 내려온다

그리곤 시냇물 가에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한다

눈물이 시냇물 따라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도록
애꿎은 얼굴만 박박 문질러 댄다
(김에스더·시인)
+ 라면 한 그릇

너는 절망에 익숙한 잡초다.
연탄불 위에서, 떨리는 젓가락 끝에서,
허기진 위 속에서,
죽은 기 펴게 하고
구겨진 자존심 일어나게 하는
끈끈한 질경이다.
일상의 난파당한 희망을 예언하는
한 끼의 실낱같은 암울한 쉼표다.

너는 한 마리 새다.
어떤 종교보다도, 어떤 위안의 말씀보다도,
어떤 정치가의 헤픈 약속보다도
가장 정직한 품삯의 눈금이다.
가장 절제된, 쪼개고 또 쪼갠 월급봉투의 진솔한 화음이다.
이 겨울 차가운 하늘을 하강하는 순백의 눈 먼 새다.

너는 한 잔의 막소주다.
어떤 수입양주보다도 폭탄주보다도,
더 강도 높은 이 시대의 뜨거운 분노다.
진하디 진한 노동의 혼불 속에서
막 건져낸 맑고 고운 사리다.
이 땅의 위태로운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서러운 자존심이다.

너는 어머니의 초상화다.
지금도 고향 아랫목에 묻혀 있을
보릿고개 긴긴 해거름에 지우던 어머니의 마른 눈물이다.
우리들 유년의 들판에 부활해 오는
한 묶음의 티풀이다. 청보리다.
어젯밤 포장마차에서 만난
잠 못 이뤄 보채는 고향의 강물 소리다.
(이광석·시인, 1935-)
+ 라면을 먹으며

라면을 먹는다. 꼬부라진 면발을 쓰린 뱃속으로 밀어넣는다. 안녕, 불면의 밤들이여. 이십 년을 지탱한 꼬불꼬불한 삶. 이제, 다시는 어둠 속에서 쓰린 뱃속으로 쓰린 눈을 비비며 젓가락질을 하지 않으리라. 안녕, 꼬부라진 면발이여.

어디로든 떠날 채비를 하여야 하는 밤. 未定의 발길에 수북히 쌓이는 라면발들이여. 젖어오는 왼눈을 지긋이 감노라면 못난 삶, 그래도 부끄럽지 않다.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기계들은 더 낡아가는데. 그래 이제는 나도 가야지.

도망치듯 홀로 몸을 빼내어 가는 날, 용서해다오. 꼬부라진 라면을 더 먹어야 할 아우들아. 우리 다시 만나리라. 꼬부라진 면발로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처럼 다시 만나리. 그럼 그때 왼눈이 흘리는 눈물이 오늘처럼 비가 되어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파도가 되어

니 가슴을 적시리.

마지막으로, 낡은 기계들 곁에서 아우들과
불어터진 라면을 먹었다. 눈물로 불은 라면은 더 맛있었다.
맛있었다.
(김시양·시인, 전남 목포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반칠환의 ´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