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3일 일요일

강태기 시인의 ´사랑은 죽지 않는다´ 외


<사랑을 노래하는 시 모음>

강태기 시인의 ´사랑은 죽지 않는다´ 외
+ 사랑은 죽지 않는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움직인다.
죽지 않기에 어쭙잖은 시를 쓰고, 이야기하고
오페라 보러 가고, 술 생각나고, 바깥 구경한다.
간혹 엉뚱한 생각을 하고 얼버무릴 때도 있다.
생명. 움직이는 것은 아름답고 그대 또한 이름다우니
아아, 사랑이여. 우리들의 목숨이여.

사랑은 죽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다.
(강태기·시인, 1950-)

+ 세상의 등뼈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정끝별·시인, 1964-)

+ ´섬´의 동사형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공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복효근·시인, 1962-)

+ 그것이 사랑

서로의 거울이 되는 것.
서로의 눈물이 되는 것.
서로의 책이 되는 것.
서로의 길이 되는 것.

서로에게 꽃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
(백승임·일러스트레이터)

+ 사랑은 참 이상합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듯이
누군가가 또 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세요?

그 사람 또한 나처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가슴에 잔잔한 파도결이 일지 않던가요?

사랑은 참 이상합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어지게 하거든요.
(정채봉·동화작가, 1946-2001)

+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하며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나태주·시인, 1945-)

+ 사랑의 묘약

비누는
스스로 풀어질 줄 안다
자신을 허물어야 결국 남도
허물어짐을 아는 까닭에

오래될수록 굳는
옷의 때
세탁이든 세수든
굳어버린 이념은
유액질의 부드러운 애무로써만
풀어진다.

섬세한 감정의 올을 하나씩 붙들고
전신으로 애무하는 비누,
그 사랑의 묘약

비누는 결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까닭에
이념보다 큰 사랑을 안는다.
(오세영·시인, 1942-)

+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고정희·시인, 1948-1991)

+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들판일수록 좋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한 장일수록 좋다.
누군가가 와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단 한 가지 빛깔의
여백으로 가득 찬 마음,
그 마음의 한 쪽 페이지에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을 마시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우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마르지 않고,
나누어 마시면 마실수록
단맛이 난다.

사랑은 가난할수록 좋다.
사랑은 풍부하거나 화려하면
빛을 잃는다.
겉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은 속으로는
알찬 수확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너무 화려한 쪽으로 가려다
헤어진 사랑을 본다.
너무 풍요로운 미래로 가려다
갈라진 사랑을 본다.
내용은 풍요롭게,
포장은 검소해야 오래가는 사랑이다.
(도종환·시인, 1954-)

+ 사랑했다는 사실

사랑에 실패란 말이 무슨 말이냐
넓은 들을 잡초와 같이
해지도록 헤맸어도 성공이요

맑은 강가에서
송사리 같은 허약한 목소리로
불러봤다 해도 성공이요

끝내 이루지 못하고
혼자서만 타는 나무에 매달려
가는 세월에 발버둥쳤다 해도 성공이요

꿈에서는 수천 번 나타났다
생시에는 실망의 얼굴로 사라졌다 해도 성공이니

기뻐하라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라
(이생진·시인, 1929-)

+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어디 한량없는 목숨이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빡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은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정일근·시인, 1958-)

+ 사랑의 지옥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유하·시인, 1963-)

+ 오늘 같은 날

일요일 낮 신촌역 마을버스 1번 안
등산복 차림의 화사한 할머니 두 분이
젊은 운전기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시우 젊은 양반! 오늘같이 젊은 날은 마음껏 사랑하시구료 그래야 산천도 다 환해진다우˝
(이시영·시인, 1949-)

+ 백치슬픔

사랑하면서 슬픔을 배웠다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사랑보다
더 크게 내 안에 자리잡은 슬픔을 배웠다

사랑은 늘 모자라는 식량
사랑은 늘 타는 목마름 슬픔은 구름처럼 몰려와 드디어 온몸을 적시는 아픈 비로 내리나니
사랑은 남고 슬픔은 떠나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슬픔이
이 백치슬픔아 잠들지도 않고
꿈의 끝까지 따라와 외로운 잠을 울먹이게 하는 이 한 덩이 백치슬픔아!
(신달자·시인, 1943-)

+ 사랑한다는 것

너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포개어
두 마음이
다정히 한 마음 되는 것

너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만나
두 눈빛이
순하고 고운 별빛이 되는 것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렇게 서로에게
은은한 배경이 되어 주는 것

너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만나
그 기쁨이
두 배로 커지는 것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만나
그 슬픔이
신비하게 작아지는 것

네가 내 곁에 없어도
가만히 눈감으면
너의 모습이
두둥실 내 맘에 떠오르는 것

이따금 네가
얄밉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네가 꽃처럼
예뻐 보일 때도 종종 있는 것

어쩌다가 맛있는 것을
너 없이 먹을 때면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잠시 목이 메이는 것

세상살이가
힘들어 울고 싶다가도
너의 환한 미소를 생각하며
다시금 불끈 힘이 솟아나는 것

한세월 살다 가는 인생이
덧없이 여겨지다가도
너와 함께하는 순간들이
이따금 영원처럼 느껴지는 것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