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0일 수요일
박경리의 ´히말라야의 노새´ 외
<어버이날 시 모음> 박경리의 ´히말라야의 노새´ 외
+ 히말라야의 노새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박경리·소설가, 1926-2008)
+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는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선
말이 없는 어머니.
(한하운·시인, 1920-1975)
+ 밥
어머니 누워 계신 봉분(封墳)
고봉밥 같다
꽁보리밥
풋나물죽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데
늘 남아도는 밥이 있었다
더 먹어라
많이 먹어라
나는 배 안 고프다
남아돌던
어머니의 밥
저승에 가셔도 배곯으셨나
옆구리가 약간 기울었다
(이무원·시인, 1942-)
+ 어머니·1
어머니
지금은 피골만이신
당신의 젖가슴
그러나 내가 물고 자란 젖꼭지만은
지금도 생명의 샘꼭지처럼
소담하고 눈부십니다.
어머니
내 한 뼘 손바닥 안에도 모자라는
당신의 앞가슴
그러나 나의 손자들의 가슴 모두 합쳐도
넓고 깊으신 당신의 가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
새다리같이 뼈만이신
당신의 두 다리
그러나 팔십 년 긴 역정(歷程)
강철의 다리로 걸어오시고
아직도 우리집 기둥으로 튼튼히 서 계십니다.
어머니!
(정한모·시인, 1923-1991)
+ 어머니
어머니
열일곱에 시집오셔
일곱 자식 뿌리시고
서른일곱에
남편 손수 흙에 묻으신 뒤,
스무 해 동안을
보따리 머리에 이시고
이남 땅 온 고을을
당신 손금인 양 뚝심으로 누비시고
훤히 익히시더니,
육십 고개 넘기시고도
일곱 자식 어찌 사나
옛 솜씨 아슬아슬 밝히시며
흩어진 자식 찾아
방방곡곡을 누비시는 분.
에미도 모르는 소리 끄적여서
어디다 쓰느냐 돈 나온다더냐
시 쓰는 것 겨우 겨우 꾸짖으시고,
돌아앉아 침침한 눈 비비시며
주름진 맨손바닥으로
손주놈의 코를 행행 훔쳐주시는 분.
(조태일·시인, 1941-1999)
+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고정희·시인, 1948-1991)
+ 어머니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인생살이 같다가도
세상살이가 힘겨워
문득 쓸쓸한 마음이 들 때
나지막이 불러보는
세 글자
어
머
니
당신의 그 여린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지어낸
이 몸
이 소중한 생명이기에
꽃잎 지듯
쉽게 무너질 수는 없어요
(정연복·시인, 1957-)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홀로 대충 부엌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시인, 강원도 평창 출생)
+ 나에게 만일
나에게 만일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내게 부족한 게 있다면
그 아버지 만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승신·시인)
+ 아비
밥 대신 소금을 넘기고 싶을 때가 있다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굵은 소금 한 숟갈
입 속에 털어넣고 싶을 때가 있다
쓴맛 좀 봐야 한다고
내가 나를 손보지 않으면 누가 손보냐고
찌그러진 빈 그릇같이
시퍼렇게 녹슬어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내가 나를 질책하는 소리,
내 속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이승이 가혹한가,
소금을 꾸역꾸역 넘길지라도
그러나 아비는 울면 안 된다
(김충규·시인, 1965-)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시인, 1970-)
+ 아버지의 안경
무심코 써 본 아버지의 돋보기
그 좋으시던 눈이
점점 나빠지더니
안경을 쓰게 되신 아버지,
렌즈 속으로
아버지의 주름살이 보인다.
아버지는
넓고 잔잔한 바다 같은 눈으로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신다.
그 좋으시던 눈이 희미해지고
돋보기 안경을 쓰시던 날
얼마나 가슴 찡하셨을까.
돋보기 안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아버지의 주름살이
자꾸만 자꾸만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이탄·시인, 1940-)
+ 아버지의 밥그릇
언 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졌다
늦은 밤 발씻는 아버지 곁에서
부쩍 말라가는 정강이를 보며
나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고서야 이불은 걷히고
사각종이 약을 펴듯 담요의 귀를 폈다
계란부침 한 종지 환한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남겼고
우리들이 나눠먹은 그 쌀밥은 달았다
이제 아랫목이 없는 보일러방
홑이불 밑으로 발 밀어 넣으면
아버지, 그때 쓰러진 밥그릇으로
말없이 누워 계신다
(안효희·시인, 1958-)
+ 한 벌의 양복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손순미·시인, 1964-)
+ 저녁식사 풍경
어금니 반쯤은 빠지고
남은 이도 흔들리기 때문에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와드득
깨물어 먹지 못하는 아버지
맛있는데 맛있는 건데
허탈하게 말하며, 그 총각무같이
씁쓸한 웃음을
흐흐흐 흐흐흐
며느리는 총각김치를 맛있게 먹다가
잠시 입맛을 잃었고
아버지는 왜 안 먹냐며
자꾸 권했다
맛있어, 먹어봐 먹어
흐흐흐 흐흐흐
우린 간신히 밥숟가락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음식의 氣만 빨아먹는 귀신같이
헛것을 먹고 있는 아버지의 웃음
어느새 그에게도 죽음의 힘이 스몄구나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아무도 우겨넣은 밥을 넘기지 못했다
(윤의섭·시인, 1968-)
+ 아버지와 숫돌
아버지는 날마다
소먹이는 꼴을 베어내는
낫을 숫돌에 가셨다
아버지가 낫을 가실 때는
수도승처럼 보였다
울 아버지는
너무나 진지하고 엄숙하게
얼굴에 땀방울 쏟으시며
정성 다해 힘을 들여 낫을 가시는 것을
어째서 그리도 반복하시는 것일까
가끔은 빼먹어도 되고
며칠은 아니 갈아도 되실 텐데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낫을 가셔서 푸른 날을 세우셨다
이제
저 멀리 북간도보다도 머나먼
피안의 세계에서 안식하시는 아버지
그리워 할 적마다
내 눈가에 숫돌이 보인다
숫돌은 스스로 자기 몸을 헐어서
낫의 푸른 날을 살렸고
아버지는 스스로 당신 몸을 갈아서
튼튼한 울타리를 치신 뒤
숫돌에 낫을 매일 가시듯
하루도 빠짐없이 자식들 향해
지금도 사랑스런 웃음 띄어 지켜보신다
(백영호·시인, 1955-)
+ 아버지
아버지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힘들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아프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없어도 돈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돈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 되어보니
우람한 느티나무처럼
든든하고
크게만 보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도
힘들 때가 있다는 것을
아플 때가 있다는 것을
돈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장이니까
가족들이 힘들어할 까봐
가족들이 실망할 까봐
힘들어도
아파도
돈 없어도
말을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문조·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