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6일 수요일

함민복 시인의 ´그늘 학습´ 외


<마음을 비우는 시 모음> 함민복 시인의 ´그늘 학습´ 외
+ 그늘 학습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옆산에서 꾀꼬리가 운다
새소리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마음은 내 마음끼리도 이리 부딪히니
나무 그늘에 좀 더 앉아 있어야겠다
(함민복·시인, 1962-)

+ 가벼워지기

채우려 하지 말기
있는 것 중 덜어내기

다 비운다는 것은 거짓말
애써 덜어내 가벼워지기

쌓을 때마다 무거워지는 높이
높이만큼 쌓이는 고통

기쁜 눈물로 덜어내기
감사기도로 줄여가기

날개가 생기도록 가벼워지기
민들레 꽃씨만큼 가벼워지기
(이무원·시인)

+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정현종·시인, 1939-)

+ 마음을 비우는 시

차창 밖으로 산과 하늘이
언덕과 길들이 지나가듯이
우리의 삶도 지나가는 것임을

길다란 기차는
연기를 뿜어대며 길게 말하지요

행복과 사랑
근심과 걱정
미움과 분노

다 지나가는 것이니
마음을 비우라고
큰 소리로 기적을 울립니다,,
(이해인·수녀, 1945-)

+ 내 마음의 첼로

텅 빈 것만이 아름답게 울린다
내 마음은 첼로
다 비워져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라고도 하겠지만
첼로는 흐느낀다
막막한 허공에 걸린 몇 줄기
별빛같이
못 잊을 기억 몇 개
가는 현이 되어
텅 빈 것을 오래도록 흔들며 운다
다 비워져
내 마음은 첼로
소슬한 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운다
(나해철·시인, 1956-)

+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비 오는 날
연잎에
빗물이 고이면
가질 수 없을 만큼
빗물이 고이면

고개 살짝 숙여
또르르 또르르
빗물을 흘려보내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가질 만큼 담는 것을.
(하청호·아동문학가)

+ 걸인의 노래

삶은 계란
반으로 잘랐더니
그 속에
보름달이
두 개나 숨어 있었네
세상이 이토록 눈부신 뜻
내장만 비우고도 알 수 있는 일
(이외수·소설가, 1946-)

+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마음을 씻고 닦아 비워내고
길 하나 만들며 가리.
이 세상 먼지 너머, 흙탕물을 빠져나와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아득히 흔들리는 불빛 더듬어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가리.
이 세상 안개 헤치며, 따스하고 높게
이마에는 푸른 불을 달고서,
(이태수·시인, 1947-)

+ 살아가는 일이 힘이 들거든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지치거든
창 밖을 내다 볼일이다

흘러가는 구름이나
이름 모를 풀꽃들에게 눈길도 주어보고
지극히 낮은 보폭으로
바람이 전하는 말을
다소곳이 되뇌어도 볼일이다

우주가 넓다고는 하지만
손 하나로도 가릴 수 있어,
그 손에 우주를 쥘 수도 있어
마음의 눈을 열면
세상은 온통 환희요 축복이다

마냥 가슴을 옥죄어 오듯
끓어오르는 설움이 불질하거든
실낱같은 그리움도 훌훌 털어
굽이치는 강물에 부려도 보고
어쩌다 허전한 날은
문설주에 귀 대고
낮 달의 낮은 음계를 헤아려도 볼일이여,

비움으로서 넉넉해지고
소실로서 아름다울 수 있는
그대 가슴에 점 하나 찍어 둘 일이여.
(최광림·시인)

+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오규원·시인, 1941-2007)

+ 생각의 나무

생각에 잠겨서
가로수 그늘을 지나갔습니다
내가 머리로 생각하고 있을 때
나무는
이파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생각의 가득함으로
햇빛이 스며들지 못하고 있을 때
나무는 벌거벗은 채 서 있었습니다

해마다 나는 생각의 나이를 먹어가고
그 무게를 알지도 못하고 걸었습니다
문득 다시 보니 나무는
생각 없이 그대로 생각이었습니다

깔깔한 내 그림자 밟고
온 몸에 주름지고 지나갈 때
곧게 뻗어 올라간 중심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줄기
낭창낭창하게 기쁜 몸이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내 생각 들키지 않게
가로수 옆을 지나갑니다.
(박영신·시인)

+ 다 놓아버려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많다 적다를
분별하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옳은 것도 놓아버리고
그른 것도 놓아버려라

긴 것도 놓아버리고
짧은 것도 놓아버려라

하얀 것도 놓아버리고
검은 것도 놓아버려라

바다는
천 개의 강
만 개의 하천을 다 받아들이고도
푸른 빛 그대로요
짠맛 또한 그대로이다
(원효·신라의 승려, 617-686)

+ 꽃잎

꽃잎은 겨우
한 계절을 살면서도

세상에 죄 지은 일
하나 없는 양

언제 보아도
해맑게 웃는 얼굴이다

잠시 살다가
총총 사라지는

가난한 목숨의
저리도 환한 미소

마음 하나
텅 비워 살면

나의 생에도
꽃잎의 미소가 피려나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고은 시인의 ´걸레´ 외 "> 반칠환 시인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