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2일 화요일

벼를 세우며-김이구-

초추의 웬 비바람이람

테레비에선 주택 사이를 노를 젓고 다녔다

닷 마지기 들논이 폭싹 주저앉았다

낮은 논은 흙탕물 속에서

잎끝만이 보였다

나는 한반도 모양으로 쓸려 엎친 벼들을

남쪽부터 일으키기 시작했다

영창이 아버지는 손이 훨씬 빨랐다

˝해가 나면 스스로

일어서지 않나요?˝

˝오늘 낼 안 일세면

썩어버려.˝

이미 누렇게

뜨고 있었다

네 포기씩 다섯 포기씩

제 몸들을 묶어

세워놓았다

비료가 많아

웃자라더니

비비람이 심하다고 쓰러지는가

꼿꼿이 선

다른 논들의

저 대견한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너희는 이제 기대고 선 몸으로

살아야 한다 실한 낟알들

제발 여물려야 한다

나는 아저씨와 함께

남쪽을 일으키고 북으로 올라왔다

일은 더디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아저씨의 고향 함경도, 아저씨의 아버지가

머슴을 살았다는 평양 부근

흙탕물을 씻고 풀뿌리를 걷어내어

함께 묶어주었다

쓰러지지 않게

하늘은 언제나

은혜롭지만 냉혹하다고

잔인하다고 모순된 생각을

믿으면서

농군이 일으키지 않으면

벼는

버림받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논에 나와보고 누구는

드러누워버렸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또 한 포기 꺾어진 벼를

흙탕 속에서 건져올렸다

농사꾼은 결코

대풍 노래를 부르지 않고

돌보고 걱정하며

베고 또 심으며

다만 떠나지 못함을

못 떠남을

다시 듣는 빗방울의

체온을 때리는 차가움이

옷을 적시고 살을 적신다

논에서 나오자

쓰러진 한반도도 없고

너른 들판이 있을 것도 같았다.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