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3일 토요일

황인숙 시인의 ´말의 힘´ 외


<말에 관한 시 모음> 황인숙 시인의 ´말의 힘´ 외
+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황인숙·시인, 1958-)

+ 말은

말은
가슴에 와 닿는
햇빛처럼
솔직해야 한다

번드르르한 말들과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이
떠오를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다
세상에는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코치세·치리카후아족 인디언 추장)

+ 유일한 재산

말은 내가 가진 유일한 보석
말은 내가 입는 유일한 옷
말은 내 삶을 유지하는 음식
말은 내가 사람들에게 주는 유일한 재산
투카람은 말이 신이라고 증언한다
나는 나의 말로 신을 예배한다
(투카람·인도의 시인, 1608-1649)

+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 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박성룡·시인, 1932-2002)

+ 나무는 말을 삼간다

나무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새를 불러
가지 끝에 앉힌다.

새가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이웃 나무의 어깨 위로
옮겨 앉힌다.

동네가 시끄러우면
건너편 산으로
휘잉 새를 날려 보내기도 한다.
(강수성·아동문학가)

+ 귀

입의 문
닫을 수 있고

눈의 문
닫을 수 있지만

귀는
문 없이
산다

귀와 귀 사이
생각이란
체 하나
걸어 놓고
들어오는 말들 걸러 내면서 산다.
(정현정·아동문학가)

+ 마음공부

혼자 있을 때는
자기 마음의
흐름을 살피고

여럿이 있을 때는
자기 입의
말을 살펴라
(작자 미상)

+ 말하라

땅 속의 뿌리를
보지 못하면서
꽃을 말하지 말라

뭇 짐승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산을 말하지 말라

별이 어둠과 있음을
알지 못하면서
우주를 말하지 말라

그러나 세상 한 티끌도
모른다 함은
언제든 순순히 말하라
(청포 이동윤·시인)

+ 말의 빛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 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이해인·수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

+ 흰 종이의 숨결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정현종·시인, 1939-)

+ 고요함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일본의 생명운동가)

+ 신이 내게 묻는다면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천양희·시인)

+ 침묵 수행

눈과 얼음으로
담벼락을 높이 둘러친
겨울숲이 안거에 들었다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으로 정진하고 있다

눈 내리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새 날아가는 소리도
멋모르고 숲속에 들어왔다가
얼어붙은 채 허공에 걸려있다

길도 끊기고
한 번 발 들이밀면
결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무덤 같은 곳이라
저절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겨울숲에서는
살과 살이 붙어서내는
화로 같은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뼈와 뼈가 부딪혀내는
칼날 같은 소리를 잊어버릴 것이다

겨울숲에
한참 앉아있으면
안거 끝내고 나가는
나무가 하는 말이라든가
바위의 소리라든가
눈 깜빡거리며 들을 수 있겠다
(김종제·시인)

+ 묵언(默言)

내 나이
어느새 쉰 셋

불혹의 고개 넘은 지
오래

이제 침묵으로
말할 때가 되었다

입으로 내뱉은 말
많은 날에는

마음 한구석이 왠지
허허롭고 편치 않다

앞으로 남은
세월에는

입은 바위처럼 무겁게
귀는 대문처럼 활짝 열고

마음은 깃털같이 가볍게
하루하루 살아야지

가슴속 깊이
푹 익은 얘기
말없이 눈빛으로 말해야지
(정연복)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이선관 시인의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