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0일 금요일

노천명의 ´구름같이´ 외


<구름 시 모음> 노천명의 ´구름같이´ 외

+ 구름같이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작음을 깨닫고
모래 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 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한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름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 풀 수수께끼이니
내 인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인생
구름같이 왔다 가나보오
(노천명·시인, 1912-1957)
+ 구름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 꽃
뭇 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 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 수놓네.
(천상병·시인, 1930-1993)
+ 꼭 말하고 싶었어요

지나가는 세상 것에
너무 마음 붙이지 말고
좀 더 자유로워지라고

날마다 자라는 욕심의 키를
아주 조금씩 줄여가며
가볍게 사는 법을 구름에게 배우라고

구름처럼 쉬임없이 흘러가며
쉬임없이 사라지는 연습을 하라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의 구름이라면....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구름 면사포

너의 품에
콩새가 살고 있다

너의 품에
하늘 나라
별들이 살고 있다

너의 품은
영원한 그리움이다

산아
오늘도
흰 면사포
얼굴을 가린 산아
(김원식·시인, 1934-)
+ 구름

저 멀리 하늘에 구름이 간다
외양간 송아지 음매음매 울 적에
어머니 얼굴을 그리며 간다
고향을 부르면서 구름은 간다

저 멀리 하늘에 구름이 간다
뒤뜰에 봉숭아 곱게곱게 필 적에
어릴 제 놀던 곳 찾으러 간다
고향을 그리면서 구름은 간다
(정근·시인)
+ 구름과 나

하늘에 구름
흘러 흘러가네

저 높이 하늘에 살면서도
하늘은 제 집 아닌 듯

나그네같이 유유히
흘러 흘러가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저 구름은

있어서도
늘 흘러만 가네.

구름 같은 것이
인생이라면

이제 나도
구름 되리라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으며

마치 이 지상(地上)은
내 집 아닌 듯

쓸쓸히 가벼이
흘러 흘러가리라.
(정연복·시인, 1957-)
+ 구름이 전하는 말

드넓은 하늘에 조각구름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괴로움은 있지

가끔 너의 슬픔 하늘에 닿아 짙은 어둠
그릴 때도 있어

네가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할 때
내가 대신 울어 줄게
굵은 빗방울 되어 흠뻑 적셔 줄게

지난날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
행복했던 순간들 아름다운 초록별로
내가 대신 노래해 줄게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지면
예쁜 꽃망울 만들어
활짝 핀 꽃으로 너에게 달려갈게
소리 없이 소복이 쌓아줄게
(현탁炫倬)
+ 구름이 전하는 말

슬픈 마음에 울려고 해도
이미 눈물마저 메마른 이여
차가운 그대를 위해 내 기꺼이
한 조각을 떼어 드리겠습니다

눈물 되어 흘러내릴 때
슬픔마저 흘려 버리소서

슬픔은 한순간인 것을
인생의 행로 속에
끝내는 머물지 못함을
이 순간 그대는 알지 못합니다
오직 슬픔에 겨워할 뿐

그대의 슬픔을 나의
작은 등에 실어 날리고 싶습니다

가녀린 어깨 위로
나의 옷자락이 스쳐가거든
주저하지 말고 잡으소서
어디론가 그대를 위해
나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거센 바람에 혹여 내 몸이
조각조각 흩어져가도
그대의 힘겨운 인생길을
작은 점으로나마 따라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슬픔이 사라지거든
하늘가에 어느 조각구름 하나가
눈물 되어 흐르다가
말없이 사라져 갔음을 기억하소서
(작자 미상)
+ 바람아 구름아

바람아 구름아
너는 알고 있겠지
내 아픈 마음을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 무엇 하나도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한낱 사람의 마음
왜 이렇게 미생물보다 못할 때가 있을까

바람이 되고 싶어라
구름이 되고 싶어라
욕심 없는 집시처럼
긴 여정을 떠돌고 싶어라

너를 지우고
내 참모습을 찾아서
구름에 실려 바람처럼 떠나리라
(유필이·시인)
+ 하늘 염소

9층 아파트 통유리창 넓은 하늘에 염소를 풀어 멕인다
염소는 구름 사이 풀밭을 누비고 다니며 하늘의 풀을 뜯어먹는다
염소야 이리 온 이리 온
염소는 눈이 오콤하다
염소는 어린것이 벌써 턱수염이 푸스스하다
뿔이 두 개나 솟았다
염소는 고집이 세다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염소를 구박하지 않는다
굴레를 씌우지도 않는다
방울을 달지 않았으므로 방울 소리도 없다
제가 오고 싶으면 잠시, 아주 잠시 유리창가에 와
나와 눈 맞추고는 이내 사라져 버리는 하늘 염소
이떻게 하면 하늘 염소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늘 풀밭 속으로 풍덩! 빠져버릴까 말까 지금 생각 중이다
(나태주·시인, 1945-)
+ 독거(獨居)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도현·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김종길의 ´소´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