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1일 토요일

가을밤 -이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 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 오리나무 숲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던
어둠 속에서 툭툭 땅을 차고 일어서서 센 혓바닥으로
송아지를 핥을 때마다 혀의 힘에 못 이겨 비틀거리던
송아지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일하는 소를, 일하다가 발톱이 찢겨진 소를 사랑한다

이미 단풍나무 끝에 가볍고 파아란 집을 매달고 겨울잠에 들어간
가을 벌레를 나는 사랑한다
그 집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따뜻한가
수염을 곧추세우고 햇빛을 즐기며 풀숲을 누비던
여치와 버마제비들
섬돌의 이른 잠을 깨우며 서릿밤을 울던
귀뚜라미를 나는 사랑한다

생각하면 나는 화려한 것의 반대켠에서 고요하고 적막한 것에
길들여져 왔다
쑥갓꽃 패랭이꽃 손톱꽃 앉은뱅이꽃,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밤의 나뭇잎 지는 소리
밤나무 뿌리를 적시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세상이 가장 조그마해지고 따뜻해지는 가을밤을,
불켜지 않아도 마음이 화안한 가을밤을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