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어제 손잡고 같이 지나간 길
담벼락 옆의 배롱나무
그 분홍꽃 같기만 하여다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라서
오직 그 자리에 있어준다면
폭설도 폭우도 다 견디고
가장 느지막하게 피어난 꽃이라면
철 늦게 다시 만난다면
환한 미소 짓는 얼굴 보고 싶어서
그 배롱나무꽃 같기만 한다면
나의 하루는 충분한 것이라서
그대가 발목의 뿌리 걷어내고
어디 멀리 가지 않는다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있어준다면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어느 묘비가 되어도 좋으리
꽃 피지 않는 날에는
무릎을 베고 누워만 있어도 좋으리
꽃 피는 날에는
애인이 되어도 좋으리
내 몸에 새겨놓은 글로
그대에게 편지 보내고 싶어서
숨 멈춘 채로 그대로
배롱나무 그대 옆에 있어도 좋으리
그대가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눈이 시리도록 보고 싶어서
무덤이라도 되고 싶어서
꽃 핀 배롱나무 그대 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