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8일 금요일

이제민의 ´낙서´ 외


<낙서에 관한 시 모음> 이제민의 ´낙서´ 외

+ 낙서

하얀 종이 위에
아무런 느낌도 없이
써 내려간
꾸불꾸불한 글씨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드러내 듯
백지 위에 끝없이
풀어놓는다.

희미하게 보이던
그 모습도
한 올처럼 점점
또렷하게 보이고
나에겐
하나의 작품인 것을
타인은 ´낙서´라고 한다.
(이제민·시인, 충북 보은 출생)
+ 낙서

담벼락 같은 세상에
누가 아무렇게나 갈겨 쓴
글 같은 것들
너를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제멋대로 그려 놓은
기호나 부호 같은 것들
아무도 해석할 수 없게 써 놓은
암호 같은 것들
눈앞에
저렇게 가득히 서 있는 것들
나무 빼곡하게 들어선 숲 같은 것들
물 가득 흐르는 강 같은 것들
그 위로 날아가는 새들
그 속으로 헤엄치는 물고기들
지상에 누가 함부로 풀어놓은 것들
예고도 없이 흩날리는 눈발 같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뜨고 지는 일월(日月)이나
변함없는 천지(天地) 같은 것들
지울 수 없게
아로새긴 *연비(聯臂) 같은 것들
두 다리로 걸어가는 것들
네 다리로 달려가는 것들
대지를 돌아다니며 낙서하는 것들
동굴 같은 세상에
너를 갖고 싶다고 원한다는
말 대신에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
그려 놓은 무늬 같은 것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연비(聯臂): 사랑하는 남녀끼리 몸의 은밀한 부분에 하는 문신
+ 낙서 철학으로 살자

세상을 쉽게 풀면서 살자.

우리가 함께 공존해야 한다면
어려운 이야기는 피하면서 살자.

세상은 바람 속에 있고
바람 속엔 내가 있다.

완행열차의 삶으로 흐르며 살자.
부담 없는 낙서 같은 존재가 되자.

나는 세상을 쉽게 살고 싶다.
(박렬·시인, 충남 부여 출생)
+ 취중 낙서

소주 한잔
앞에 놓고
북어 한 마리
세상 분풀이하듯
두들겨
신문지 위에 펼쳐 놓고

창 틈으로
새어드는 달빛 벗하여
거칠은 내 인생도
한잔
역겨운 세상살이도
한잔

그리운 옛사랑도
한잔
취하여
허전한 마음에 또
한잔

뉘라서
인간의 귀천을
말할 것인가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인 것을

비집고 들어설 자리 없어
밀리고 밀려온
지구 한 귀퉁이
달빛 벗하여
소주 한잔이 있고

취하여
풍성한 내
세상이 있는
취중에서
하늘은 돈짝 만큼으로
내 머리 위에 있누나
(김근이·시인, 어부 시인)
+ 작은 엽서·3 - 겨울 낙서

그대 떠난 지 이미 오래거니
그래도 살다보면 그대 얼굴 보고 싶어
죽음처럼 지쳐 돌아오는 가난한 겨울 저녁
바람 부는 거리 한 모퉁이에 잠깐씩 멈춰 서서
무수히 발가락 끝으로 끄적거려보는
그대의 얼굴과 이름
언제까지나 지울 수 없는 한 가닥
내게 그리움이었네, 사랑이었네
그대 떠난 지 이미 오래거니
(김선태·시인, 1960-)
+ 사랑의 낙서

너의 맑은 눈빛을 보면
난 왠지 자신이 없어
투명한 목소리는 가끔씩
나를 꿈꾸게도 하지

다정한 미소에 눈물나는,
아마도 이것이

사랑인가 봐.
(이풀잎·시인, 광주 출생)
+ 하늘 낙서장

푸른 밤하늘에
˝사랑한다˝
썼다가
구름이 슬쩍 지워 주기에
다시,
˝영원히 사랑한다˝
쓰려는데
달님이 두 귀 쫑긋 세우고
눈 흘겨 쏘아보더라
깜짝 놀라
손가락만 잘근,
깨물어 버렸다.
(구경애·시인, 1961-)
+ 어느 죄수의 낙서

누가 내게 고삐 매었소
몸부림 한 번 쳐봤을 뿐인데 그물에 갇혀 비린내 나는
물고기가 되고 말았소

가난한 쇠딱지 떼어내지 못한 죄의 칼 벗지 못하여
숨 한 번 크게 쉬어본 적 있었던가
쇠창살 녹이고도 남을 끓어오르는 외침
내 말 좀 들어보소

발자국마다 천년저주 밟히고
붉은 이름 석자가 꿈길 달려가는 밤마다
푸른 옷 입은 내 모습 낯설기만 해
깊어만가는 수렁에 흉터투성이 몸 던지곤 합니다

누가 내게 고삐 매었소
나는 짐승이 아니란 말이요
나는 짐승이 아니란 말이요
(최봄샘·시인)
+ 낙서

아직 징역살이 고달프다거나
지루하단 생각할 겨를이
없네

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가서는 죽음
세면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혹은 면회를 가거나
고무신 끌고 나서는 길이란
길은 모두 죽음으로
열려 있으니

기막힌 일일세
죽어 무덤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관 속 같은 독방에 누워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살아나
죽음과 마주앉는 연습을 해야 하는
나의 일과란

허나 벗이여
죽음은 대할수록 낯설고
청춘은 자꾸 죽음과 돌아앉으려 하는데
스물세 살짜리 젊음에게
도대체 조국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고 사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대답해 주렴
살아 있음의 안부보다
죽음을 향해 던지는 이 절박한 질문에
대답해 주렴

조국은
우리들 가슴에 찍힌 붉은 수번이고
죽음은 밧줄에 걸려 있는
캄캄한 어둠이고
사랑은
또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르며
서슴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여기 이 관속에
누군가 새겨놓은 피 묻은 낙서보다
더욱 아름다운 말로
내가 내 조국을
내가 내 죽음을
내가 내 사랑을
마침내 노래하게 해다오
(문부식·사회운동가,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차성우의 ´해탈´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