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7일 목요일

전설(傳說)

달빛 걸음 쉬어가는 다락 위
먼지 켜켜이 쌓여있는 나무상자 속에
오래된 책이 한 권 있어
세월의 이끼 묻은 흔적을 지운 후에
무심하게 책장을 펼쳐보니
사랑이라는 제목이
선사시대 암각화처럼 박혀 있고
묘비명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대와 나 사이에도
시간과 공간이 가로 지르고 가버린
천년 전의 은행나무가 있어
변치 않으리라는 황금빛의 약속을 깨고
가을비를 맞으며 나뭇잎은 추락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신음하며 눈물짓는
은행나무 이파리를 밟지 말아라
저 운명의 황금을 밟는 순간
발바닥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그리움이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고
몸속으로 가지가 독처럼 퍼져 자라나서
은행나무가 되는 것이니
안개바다 밀려오는 하늘 바라보며
우뚝 선 사랑에 눈이 멀게 되리라
그래서 그대가 숨쉬며 살고 있는 곳과
내가 죽어 쓸쓸하게 묻어 있는 곳
그 오래된 시간 만큼의 사랑
그 먼 거리 만큼의 사랑을 찾아가려고
나뭇잎 푸르른 날들을 다 보낸 다음
비 오는 늦은 가을
예전에 그대와 맹세한 말처럼
나, 이렇게 그대가 걸어가는 길마다
전설처럼 은행나무가 되어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