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0일 수요일

정연복의 ´설거지´ 외


<설거지에 관한 시 모음> 정연복의 ´설거지´ 외

+ 설거지

언제부터인가
설거지가 참 즐겁다

설거지할 그릇이
수북히 쌓인 것을 보면

신나는 일이 생긴 듯
오히려 기쁘기까지 하다

일주일에 고작 한 시간 남짓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밀려오는 졸음을 참느라
몸을 비비꼬기 일쑤인데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도
마음은 영 맑아지지 않는데

세상살이에 지친
나의 손길을 애무하는 듯

주르르 흐르는 물의
포근한 리듬을 타고

몸과 그릇이 하나 되어
열심히 손을 놀리다 보면

상쾌하다 못해
순결해지는 느낌의 마음

나는 접시의 겉을 닦지만
설거지는 내 영혼 깊숙한 곳을
말갛게 씻어 준다
(정연복·시인, 1957-)
+ 그릇을 닦으며

어머니,
뚝배기의 속 끓임을 닦는 것이
제일 힘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차곡차곡
그릇을 포개 놓다가
보았어요,
물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내가 그릇이라면,
서로 포개져
기다리는 일이 더 많은
빈 그릇이라면,
내 뒷면도 잘 닦아야 하겠네요.

어머니,
내 뒤의 얼룩
말해주셔요.
(윤미라·시인)
+ 설거지

엄마를 돕겠다고
설거지를 시작했어요

빨간 고무장갑 손에 끼고
반들반들 그릇 닦아요

유리접시는 깨질까봐
내 마음이 콩닥콩닥

플라스틱 접시가
마음 편해요

뽀득뽀득 반들반들
깨끗이 닦았더니

엄마께 칭찬 받고
정말 정말 기분 좋아요

엄마 힘드실 때
또 도와 드려야지

즐거운 설거지!
(김은정·아동문학가)
+ 설거지

엄마 아빠가
잠깐 외출한 사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

아빠 국그릇,
엄마 밥그릇,
내 밥그릇을 씻어서
포개어 놓았다.

그릇들이
우리 가족처럼
서로 꼬옥 안아주고 있다.
(작자 미상)
+ 설거지

뽀득뽀득 반짝 반짝 설거지
송글송글 맺혀가는 땀방울

깨끗한 마음 담아주는 그릇
즐거운 마음 집어주는 젓가락

기대된 마음 끓여주는 냄비
신기한 마음 퍼주는 주걱

이러한 마음들은
설거지로 반짝반짝
(정동수·홍천 남산초등학교 6학년)
+ 설거지

수세미 가득
거품을 물지 않아도
고요히 사라질 흔적 앞에서
무엇이 서러워
흘리는 눈물인가
쏴르르 쏟아지는
수도꼭지 잠그고
살며시 돌아보는 하늘가에
장마비가 서렸다
(김도화·여류 시인)
+ 설거지를 하면서

아내가 잠든 사이 설거지를 해본다
덩그런 개수대 한중간에
양푼냄비 바닥부터 층층이 쌓인 식기들
간장종지는 밥그릇 안으로 파고들고
밥그릇은 국그릇 위에 얹혀지며
젓가락은 쭈뼛하게 돛대로 꽂힌 채
난파선처럼 기울어 있는 우리 살림 밑천들
큰 것은 작은 것을 보듬어 안고
켜켜이 속을 채운 오지랖 질서
해무(海霧) 같은 세제의 거품으로
오염된 생활의 부속을 씻긴다
내 문패같이 오종종한 한쪽 공간에 바다가 있었다니
아내는 끼니 후에 난파되는 배의 키를 거두어
해신제를 지내듯 하루 꼭 세 번
이것들을 닦아 진설했구나
수없이 바다에 손을 담그고 절했겠구나
엔진처럼 따뜻한 밥이
식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젖은 손을 갑문처럼 여닫아 묵은 바다를 비우고
새 바다를 담으려 하였겠구나.
(정건우·시인, 강원도 양구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황순택의 ´올라가기´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