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8일 토요일

언약

언약


내 당신께 바친 언약은

떠나는 당신을 하염없이 지켜보도록

나를 붙들어 세우는

동아줄이 되었습니다
내 당신께 바친 언약은

이제 당신을 떠나야 한다는 나를

한사코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랑할 때 무심코 바친 언약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들 때마다

함께 고개를 내밀며

당신께 달려가려는 나를 주저앉힙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나는

이런저런 약속 참 많이도 했고

아직껏 어느 것 하나 감당치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던 님을 잃고 방황하던 당신에게

사랑의 대역(代役) 되겠노라

사랑의 청지기가 되겠노라

맹세하고
당신이 한눈 팔 때만 골라

사랑의 주역(主役)이 되겠다며 졸라대면

대역 20년이면 주역 된다며 당신은 웃어넘길 뿐

내 말 허랑하다 내색도 않았습니다


어찌 천길 절벽 위의 철쭉 꺾어 바치는

노옹(老翁)이 되지 못할 건가

남아 생애에 어찌 당신을

여왕 자리에 앉히지 못하랴
당신은 그런 빈말에도 재밌어 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옛 사랑 찾아 떠나야 한다며 눈물 흘리는 당신에게 나는

바위가 자갈 되고 자갈이 모래 되도록

묵묵히 기다리는 한 개 바위가 되겠다며

지워질 수 없는 대못을 당신 가슴에 밖아 선물했습니다
내 세월이 안정되고 한가로워지면

다시 당신 찾으리라

지옥이라도 함께 하리라

내 세월이 천국 될 때 다시 오리라

이런 거짓도 당신 가슴에게 뿌려 넣었습니다


당신은 내 이 거짓도

소중하게 명심하며 기다리겠노라 했습니다
당신이 떠난 후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던지는

언약의 무서움을 알았습니다
날이 지나고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수록

당신에 대한 언약 또한

무게를 더하고 있습니다
언약은 그리움만으로 당신에게 달려가려는

내 자신을 붙들고 가로막아 서기에

당신의 기다림에 기대어

이제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허물벗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이 되었습니다

내 언약은 비록 속은 텅 빈 강정이지만

반드시 이뤄내야 할 당신에게 바치는 내 약속입니다

그래 이왕이면 당신에게 더 큰 화관(花冠)을 씌우기 위해

당신이 곁에 있을 땐 차마 꺼내지 못한

새로운 언약까지 보태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겠다

넌 내 성모(聖母) 마리아가 되어다오
언약은

당신에게 바치는 언약은

그렇게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언약이 커질수록

당신에게 건 내 도박도 커지고 있습니다

(후기)


당신은 내 반어(反語)를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 노옹

향가 ′헌화가(獻花歌)′에 의하면 순정공(純貞公) 부인인 수로(水路)부인이
절벽 위에 핀 철쭉꽃을 아름답다 감탄하였으나
아무도 따다 주지 못할 때, 노옹(老翁)이
자주빛 바위 끝에
잡아 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이다
는 노래와 함께 절벽을 기어올라 철쭉을 꺾어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