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6일 수요일

하청호의 시 ´마중물과 마중불´ 외



<물에 관한 시 모음> 하청호의 시 ´마중물과 마중불´ 외
+ 마중물과 마중불

외갓집 낡은 펌프는
마중물을 넣어야 물이 나온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땅 속 깊은 곳
물을 이끌어 올려주는 거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도
마중불이 있어야 한다.
한 개비 성냥불이 마중불이 되어
나무 속 단단히 쟁여져 있는
불을 지피는 거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이끌어 올려주는 마중물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지펴주는 마중불이 되고 싶다.
(하청호·아동문학가)

+ 물

가벼운 것들은
물 위에 뜬다
물이 떠받든다
속을 비운 것도
물 위에 뜬다
물이 떠받든다.
(박방희·아동문학가, 1946-)

+ 물을 마시며

물을 마신다.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모여 살다 왔는가.
머루 냄새가 난다.

유리컵에 얌전히 담겨 있는
물은
한때는 높은 계곡에서 뛰어내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깔깔댔었지.

바위의 살결을 만지며
즐거운 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엔가 댐에 갇혀
반짝반짝 햇볕에
등을 말리기도 했었지.

우리의 밥상머리에서
목마름을 축여주는
물아,

오늘 아침은
누구네의 수도꼭지에서
또 그렇게
통쾌하게 쏟아지느냐.
(오순택·아동문학가)

+ 물방울

물방울이 스며든다.

뭔가 움켜쥘 손도 없고,
누군가 짓밟을 발도 없고,

오직 맑은 눈망울만 있으므로
스며든다.
열매에 ... 별에 ... 다정한 흙 속에 ...

사랑하는 사람들은 스며든다.

오직 서로를 바라보는 눈망울만 있으므로,
물방울이 그러하듯이.
(이준관·아동문학가)

+ 산골짜기의 물

산골짜기의 물은
언제나
산골에 머물고 싶어한다.

봄이면 수줍어 바위틈에 숨어서
사알짝 얼굴 붉히던
진달래의 고운 마음씨가
마음에 들고

밤이면
솔밭 사이로 달려온
달님과 어울려
숨바꼭질
즐겁고

징검다리 지나면
등잔불 밝혀 놓고
도란도란
사랑방 이야기가
재미있고

산골짜기 물은
이끼 낀 청바위를 돌면서
산골짜기를 치어다보고
또 한번 돌아서
산골 마을 되돌아보고

언제나
산골에 머물고 싶어
자꾸 맴을 돈다.
(강영희·아동문학가)

+ 물 끓이기

별일 아닌 것 가지고
화르르
성을 내는 가스레인지

싸우기 싫어
부글부글
속으로 참는 주전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가스레인지
활활 덤벼들자
그만, 삑삑 울어 버리는 주전자

울음소리에 놀란 엄마
따다닥
가스레인지와 주전자를 떼어놓는다.
(최점태·아동문학가)

+ 날고 싶은 물

주전자 속에서 날기를 기다리던 물
몸이 따뜻해지자
민들레 홀씨처럼 흰옷 걸치고 날아간다

시원하다 시원하다 꼬리를 흔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간다

주전자는 눈물 질질 흘리며
잘 가라고 인사한다

물과 주전자는
지금 헤어지는 중이다
(박순숙·아동문학가)

+ 한강물 속 그림자나라

밤이 되면
강물 속에도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지.

한강변 아파트도
물 속으로 내려와
한 집, 두 집
불을 밝히지.

심심하던 송사리 떼
가로등 아래 왁자그르
숨바꼭질 신이 나고

밤잠 안 오는
물새 몇 마리
초인종 눌러대며
아이들 불러낼 궁리를 하지.

´딩동딩동´
초인종 소리에
나만한 아이

˝누구니?˝ 하고 달캉
현관문을 열어줄 것 같은
강물 속 아파트 동네.
(한상순·아동문학가)

+ 물수제비

내가 뜨는 물수제비는
던진 길로
퐁당 물에 빠진다.

삼촌이 뜨는 물수제비는
날씬,
통! 통! 통!
물탕을 튕기며
날아간다.

날아가는 동안
납작한 돌멩이 어깻죽지에
작은 날개가 돋아난다.
둥그런 배때기에
가느다란 다리가 돋아난다.

물 위를
촘, 촘, 촘 딛고
날아가서는
돋았던 날개, 다리를 재빨리 접고
물밑으로 갈앉는다.
갈앉아 후유- 가쁜 숨을 고른다.
(이상교·아동문학가, 1949-)

+ 나만의 비밀

개울에서 놀다가 그만 급해서
물 속에 앉아 쉬를 하고 말았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 두리번두리번
나 혼자 몸을 한 번 떨었습니다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
(안도현·시인)

+ 비온 뒤의 강물

낯선 얼굴들이
처음 만났는데도
낯가림도 않고 이내 친해진다.

달동네 지붕을 타고 내린 물도
부잣집 마당을 지나온 물도
만나자마자 하나가 된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하느라
조금은 떠들썩했다가도
이내 제자리를 찾아 조용하다.

자리다툼할 줄도 모르고
뽐낼 줄도 모른다.
차례를 지켜 아래로만 흐른다.
(최춘해·아동문학가)

+ 강물처럼

왜 강물인 줄 아니?
흐르기 때문이래

고여 있고만 싶다면
강물이 될 수 없는 거래

흐르고 흘러서
내게도 오고
네게도 가고
바다까지 가는 거래

거기엔 고래가 산다잖아
강에선 볼 수 없는
글쎄, 집채만 하대

너도 흘러 본 적 있니?

음… 음…
함께 웃고
도와 주고
나눠 주고
이런 게 흐르는 거라면
(현경미·아동문학가)

+ 물빛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혀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마종기·시인)

+ 물맛

절집에 놀러갔다가
주인이 잠시 출가한 사이에
어찌나 목이 마르던지
물 한 바가지 훔쳐먹는데
그 맛이 기막히더라

누구는
웬 호들갑이냐 하면서
물맛이 뭐 다 그렇지 하겠지만
집마다 맛이 다른 게
앞마당에 파놓은
깊고깊은 우물이더라

그래도
물맛을 제대로 못 찾았다면
예배당에 한 번 가봐라
입구에서부터
잔 건네주면서 물 따라주는데
그 맛이 또 별미더라

따지고 보면
짠 소금기의 바닷물 싫어서
제 태어난 계곡으로 되돌아오는
연어나
들녘에 내린 간밤의 빗물에
불쑥 돋아난 붓꽃 같은 것들도
물맛을 온몸으로 깨우친 거더라

생生에서 기쁨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물맛 제대로 아는 것이더라
(김종제·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연복 시인의 ´바람과 햇살과 별빛´ 외 "> 성 빅토르의 ´아담의 기도´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