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5일 일요일

´봄날의 기도´ 외


<정연복 시인의 봄 시 모음> ´봄날의 기도´ 외

+ 봄날의 기도

겨우내 쌓였던 잔설(殘雪) 녹아
졸졸 시냇물 흐르듯
지난날의 모든 미움과 설움
사르르 녹게 하소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스운 봄바람에
꽁꽁 닫혔던 마음의 창
스르르 열리게 하소서

꽃눈 틔우는 실가지처럼
이 여린 가슴에도
연초록 사랑의 새순 하나
새록새록 돋게 하소서

창가에 맴도는
보드랍고 고운 햇살같이
내 마음도 그렇게
순하고 곱게 하소서

저 높푸른 하늘 향해
나의 아직은 키 작은 영혼
사뿐히
까치발 하게 하소서
+ 꽃눈

겨울의 앙상했던
너희, 가지들 영영
죽어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동장군(冬將軍)의 위세 앞에
알몸 고스란히 드러내고
맥없이 얼어죽은 듯했던
너희 가느다란 목숨

안으로, 안으로
숨죽여 생명을 지으며
악착같이 살아 있었구나.

긴 겨울날의
미운 꼬리는 아직 남아
꽃샘추위 매서워도

꿈처럼 기적같이
너희 가지마다 슬금슬금 돋는
연초록 눈부신
꽃눈, 꽃눈, 꽃눈들

너희의 말없는 인고(忍苦)로 피어난
생명의 빛 알갱이들
+ 꽃샘추위

이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

겨울 끝자락의
꽃샘추위를 보라

봄기운에 떠밀려
총총히 떠나가면서도

겨울은 아련히
여운을 남긴다

어디 겨울뿐이랴
지금 너의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 보라

바람 같은 세월에
수많은 계절이 흘렀어도

언젠가
네 곁을 떠난

옛 사랑의 추억이
숨결처럼 맴돌고 있으리
+ 봄

늘 수수한
모습의 당신이기에

입술에 진한 루즈를 바르거나
손톱에 매니큐어 칠한 것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곤한 잠에 떨어진
당신에게
이불을 덮어 주다가

불현듯
나는 보았네

연분홍 매니큐어
곱게 칠한 너의 발톱

어쩌면 이리도 고울까
마치 꽃잎 같애

진달래처럼
라일락처럼

너의 작은 발톱마다
사뿐히 내려앉은 봄
+ 봄

겨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의 작별 의식인 듯

봄빛 담은 햇살 사이로
한바탕 함박눈이 뿌렸다

기나긴 겨울 한철
죽은 듯 말없이 있더니

어느새 파릇한 봄기운
살그머니 풍기는 저 여린 가지들

너희들 살아 있었구나
살아 봄을 잉태하고 있었구나

오!
작은 생명의 신비한 힘이여

봄은 거짓말처럼
지금 눈앞에 와 있다
+ 진달래

삼월의 마지막 날
으스름 저녁

꽃샘추위
아직도 매서운데

야트막해도 곳곳에
바위들이 카펫처럼 깔린

투박한 길을 따라
아차산에 올랐다

산의 여기저기
몇 그루씩 무리 지어

어느 틈에 만발한
진달래꽃은

저 먼 옛날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이
환생한 것인가

진분홍
그 고운 빛깔로

봄의 도래를 알리는
저 핏빛 아우성
+ 진달래

꽃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삼각산을 오르다가

나목(裸木)들의 더미 속
가녀린 여인의 몸 같은

진달래 한 그루가
몇 송이 꽃을 피웠다

수줍은 새악시 볼 같은
연분홍 고운 빛 그 꽃들은

속삭이듯 말했지
봄이다!

너의 그 가냘픈 몸뚱이 하나로
온 산에 봄을 알리는

작은 너의 생명에서 뿜어 나오는
빛나는 생명이여

말없이
여림의 강함이여!
+ 프리지어

봄빛 따스한 길을 따라 걷다
프리지어 한 다발을 샀다

봄의 전령인 듯 당당하면서도
새색시처럼 수줍은 모습의 프리지어

코끝에 번지는 진한 향기에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

그리고 불현듯
스치는 욕심 하나

이 꽃이야 이렇게 한철
피고 지기에 아름답다지만

당신의 향기에 취하여
그리움에 안달이 나서

이리도 안타깝고도
행복한 이 가슴속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영원하기를!
+ 목련

목련이 지독한 생명의
몸살을 앓는 것을
며칠을 두고 몰래 지켜보았다

꽃샘추위 속 맨몸의 가지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꽃눈 틔우더니

온몸으로 온 힘으로
서서히 치밀어 올라
이윽고 꽃망울로 맺히더니

송이송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저 여린 생명의
고독하고 치열한 몸짓

목련은
쉽게 피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목련은
저리도 당당하게 아름답구나
+ 꽃들 앞에서

봄이 왔나 싶더니
어느새 온 사방이 꽃 천지다

꽃들 앞에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개나리처럼
명랑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너는 벚꽃처럼
말없이 작고 예쁜 것의 소중함을 아는가?

너는 진달래처럼
불타는 연정(戀情) 하나 마음속에 품었는가?

너는 목련처럼
순수한 생명의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가?
+ 봄날의 사랑 이야기

사랑은 장미처럼
활활 불타지 않아도 좋으리

사랑은 목련처럼
눈부시지 않아도 좋으리

우리의 사랑은
봄의 들판의 제비꽃처럼

사람들의 눈에 안 띄게
작고 예쁘기만 해도 좋으리

우리의 사랑은 그저
수줍은 새색시인 듯

산 속 외딴곳에
다소곳이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꽃
같기만 해도 좋으리

이 세상 아무도 모르게
우리 둘만의 맘속에서만

살금살금 자라나는
사랑이면 좋으리

* 정연복(鄭然福) : 1957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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