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의미있는 이번 설

의미 있는 이번 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가끔 설과 추석을 번갈아 가며 용인에 살고 있는 아들집으로 가게 되었다. 아들 가족들은 고향인 마산에 오고 싶어 하지만, 내가 손녀손자가 오랜 시간 고생하고 올까봐 이번 설도 용인에 가기로 결정했다. 마침 출장 온 아들의 승용차를 타는 순간 마음속으로, 이곳 마산의 가족들은 참 즐거운 하루를 보낼 것인데 하는 미련이 있었지만, 추석이 올 것이라는 세월의 끈에 미련을 묶어 놓았다.

설날아침, 어머니께 먼저 전화를 드렸다. 가족들이 다 모여서 너무 재미있다고 하신다. 마산의 설은 대 가족들이 집합을 했지만 아들집의 가족은 겨우 5명이다. 설 기분 같지 않은 설날이다.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세배가 끝난 후 식사를 하고 우리의 목적지인 서울 경복궁으로 향하여 출발!
서울 가면 자주 가 보는 곳이라 큰 호기심은 없었지만 설날 오전의 경복궁은 마치 조선시대의 대문을 여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 왔다. 입구에는 조선시대의 복장을 한 군인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옆에 서서 관람인들과 사진 촬영도 해 주며 무표정하게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다. 깊숙이 들어가서 근정전 안을 드려다 보았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며 신하들이 새해 인사를 드린 곳이고, 국가 의식과 사신을 맞이한 건물이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 층이다. 겨울이라서인지 뒷면 가운데 자리한 임금의 어좌가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 예전 왕들은 지금의 우리들보다 고생을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꼬마 손자가 카메라로 기념 촬영을 아주 잘 한다. 장래 꿈이 건축사라며 이곳저곳 고궁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나는 고궁도 신비하고, 예쁘고, 화려하지만 꿈을 찍는 손자의 모습이 더 멋져서 웃음이 나왔다.
하루 만에 들릴 곳이 많아 약 3시간동안 관람을 하고 나왔다. 외국인들도 많이 왔다가곤 한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숭례문이 보였다. 내려서 사진을 찍고 가자 하다가 손자가 배가 고프다고 졸라서 다음으로 미루고 지나갔다. 아-? 그런데 사람이 한치 앞의 일을 어이아리! 3일 뒤에 예기치도 않았던 불이 날줄이야---. 숭례문이 원형대로 살아 있을 때 사진이나 남겨 둘 것을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슴을 두드리게 했다.

며느리 친정집을 갔다. 우리들을 기다리며 식사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모두 세배를 하고 식사를 했다. 우리나라 풍습으로는 며느리가 시집에 가서 설날을 보내고 다음 날 친정집엘 가는데 이번 설은 그 풍습이니 관습이니 하는 것 깨고 내가 먼저 사돈집을 갔다. 다른 집의 껄끄러운 안사돈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 교회 한 전도회서 만났던 친구 같은 사돈이라 서로 만만했다. 몇 개월 전에 바깥사돈이 세상을 떠나서 위로 차 갔다. 아니나 다를까. 안사돈이 예전에 즐겨 불렀던 한국가곡집을 내어놓고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다 갑자기 아! 이 노래하면서 넘기는 곡이 있다. 고진숙시. 조두남곡 <그리움>이다. 사돈은 그리움을 틈만 나면 부른다고 한다. 벽에 걸려있는 남편의 사진을 떼어 버리고 잊어버릴까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리워서 ‘-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를 부르며, 이 노래는 나를 위해 지은 것 같다고 한다. . 무슨 노래든지, 설교든지, 자기가 체험을 하기 전에는 큰 감동이 없다. 체험을 하는 순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바깥사돈의 삶과 성품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노랫말을 되새기며 함께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

다음날 그다음날도 나는 손녀의 음악학원에 가서 피아노 레슨(lesson)을 했다. 아들이 제 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극성이 보통 아니다. 나는 그 점이 못 마땅하다. 그런데 기특한 것은 제 아빠의 극성에 따라가며 몇 시간을 연습하고 있는 손녀다. 피아니스트(pianist)의 길이 얼마나 고생인지 모르고 막무가내로 나가는 아들의 열성에 머리가 아프다.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펄펄 끓다가 장애물이 오면 빨리 식을까봐 걱정이다.

주일이다. 아들이 섬기는 분당 구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아들은 성가대에서 베이스파트(basspart)를 맞고 있다. 목사님 설교도, 교회 분위기도, 성가대 찬양도 아주 조용해서 영혼의 안식을 찾은 것 같았다. 현대 교회는 시끄럽게 찬양을 하는데 어찌 그리 조용하느냐고 했더니 오후 예배는 그렇게 한다고 했다.

오후 6시. 친구와 약속한 현대백화점으로 갔다. 친구의 안내로 고급식당엘 들어갔다. 그 곳에는 금년에 91세인 민영환목사님 부부와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영환목사님은 내 선친의 친구이시다. 목사님을 전도한 아버지인지라 목사님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고 한다. 아버지가 천국가신지 30년이 지났는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의 은혜로 우리 가족들은 영육 간에 축복을 받고 살고 있다. 전도한 친구의 가족이라고 가는 곳마다, 초청자리마다 소개하시는 목사님을 뵈올 때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민영환목사님은 목회하시면서 고생도 수없이 하셨지 만은, 그 상급으로 부부가 91세까지 해로케 하시는 축복을 받으셨다. 뿐만 아니라 두 아들이 우리나라 명문대학의 교수로, 외동딸도 대 기업의 사장부인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예수 믿고 복의복을 받은 셈이다. 95년 5월에 민영환목사 결혼 60주년 기념식에 필자가 우리 가족을 대표하여 시 한편을 써서 낭독을 했는데, 그 시의 마지막 행에 < 선친의 못다 사신 명까지 더 하시어 사시라>고 쓴 것처럼 장수 하신 것을 뵐 때에 기뻤다.

월요일, 김경선 원장님 덕분으로 <그리움> 의 시인 고진숙 선생님을 만났다. 며느리가 친정어머니를 위로해 주신 가곡의 시인에게 간단한 선물을 사가지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처음 만나 무슨 할 말이 있겠으랴 싶어 1시간을 정하고 갔는데, 대화가 척척 맞아 떨어져 약 5시간을 장소를 바꾸어 가며 애기를 했다. 그도 그런 것이, 마산에서 사셨고, 과거 직업도 음악교사, 은퇴장로, 시인, 현재 주소도 아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 가족들이 섬기는 교회도 분당 구미교회 등 메트로놈 맞추지 않아도 대화의 박자가 잘 맞다. 나는 내 작사집 한권, 고선생님은 CD 한 장을 서로 선물로 나누고 해 떨어질 무렵 백화점 문을 나왔다.

내일이면 마산을 돌아간다. 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이번 설에 너희들이 없어서 섭섭하였지만 말도 표현할 수 없이 재미있었다며 자랑을 하셨다. 나도 질세라 어머니께 자랑을 했다.
“ 어머니! 우리들도 이번 설에는 노는 즐거움보다 더 의미 있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설명해 보라고 하시는데, 내려가서 얘기 하겠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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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간략하게 이번 설의 이야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