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9일 월요일

나호열의 ´큰 바보´ 외


<바보에 관한 시 모음> 나호열의 ´큰 바보´ 외

+ 큰 바보

슬픈 일에도 해죽거리며 웃고
기쁜 일에는 턱없이 무심한 사람
그 곁을 애써 피해 가지만
걸어가야 할
먼 길
바보가 되어 가는 길
(나호열·시인, 1953-)
+ 바보들

동네 골목길
담벼락에 쓰인
커다란 낙서
˝바보˝

어릴 적
바보가
아주 큰 욕인 줄 알았다

어른이 되어서야
바보가 욕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바보˝는 ˝순수˝의
이음동의어

모든 것이 돈으로
저울질되는 오늘날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
˝바보˝

그 바보들 틈에서
노는 것이
마냥 즐겁다.
(이문조·시인)
+ 나는 바보

욕하면
그 욕을 먹을지언정
따라서 욕하지 못한다

때리면
그 매를 맞을지언정
맞서서 때리지 못한다

버리면
버림을 받을지언정
스스로 버리지 못한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바보

소유에 욕심이 없고
손에 쥔 것으로 만족하며
홀로 있어도 외로움을 모르고
이웃의 미움도 받아들이고

위험에도 두려움을 모르며
가난할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잘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고민일랑 웃어넘기고
자존심은 땅에 묻어놓고
높은 사람 앞에서도
굽실거리지 않으며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고
남들을 괴롭히지 않으며
한평생 원수를 맺지 않고
하루를 살아도 감사하는 사람

바보라고 놀려도 웃기만 하고
싫어해도 등 돌리지 않으며
내일에 대하여 근심이 없는
이런 바보가 되고 싶다.
(박인걸·목사 시인)
+ 바보의 노래

작은 몸 하나로
겨울을 버티고 있어야 하는 자야
눈물을 가슴으로 훔치며
살아 있어 산다하는
마음은 구천같이 떠도는
가슴 아픈 자야

등에는 한 보따리 슬픔이던가
가슴에는 하나 가득 아픔이던가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허리엔 쓰디쓴 미련을 차고
밤마다 종이 펴고 그림 그리는
네가 있어 행복했던 꿈을 그리는
네가 있어 아름다운 추억 그리는
바보 같은 자야

이제 길을 떠나자
비오면 오는 대로
바람불면 부는 대로
그래도 슬프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가자
외로운 산길이면
울면서 가자

산너머
그리운 마을
찾아서 가자
(김진학·시인, 경북 영천 출생)
+ 바보처럼 살라 하네

밤새 숨었다가
아침에 얼굴 내민 해가
웃으라 한다

시린 등 쓰다듬으며
괴롭거나 슬프더라도
웃으라 한다

그날이
그날인데

하루를 지나며 만물을 살피고
구석구석 밝혀 주며
웃으라 한다

세상이 야속타
용광로가 끓어도
서러워 말라 다독이며

날 보고
날 보고
웃으라 한다
(하영순·시인)
+ 바보가 바보에게

우린 돈을 잘 모르고
세상 지위에도 관심이 없고
좋은 음식 좋은 옷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지요

특히 교만이나 아집
시기나 분노
이러한 것도
자존이나 탐욕이 별로 없으니
남의 나라 얘기 같지요

그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창을 열고 새소리를 듣지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터로 가지요

길가는 이웃에게
˝어머 오늘은 얼굴이 밝아 보여요!
무슨 좋으신 일이라도!˝
반갑게 인사하고 님이 보내준 커피 한 잔
아침햇살을 받으며 가볍게 몸을 데우지요

우린 늘 누구에게나 손해를 보며 살지요
그래도 히죽 웃는 마음은
아파하기보다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뭘!˝
이런답니다.

그래도 한세상 살아가는 데는
이 마음 버리고 싶지 않아요
내게 주어진 것 모두 없어져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나를 닮은 바보가 있잖아요
그 바보가 나를 사랑하는 한
나는 평생 이 바보의 길을 갈 거예요
설령 그 바보가 계산물이 들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 길을 갈 거예요

세상사람 전부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훨훨 날아다녀도
나는 내 마음의 정원에 꽃을 심고
바다향기를 내 발등에 뿌리며
그냥 황톳빛 이 길을 갈 거예요
별로 날고 쉽지가 않거든요
바보는 머리가 나빠서 피곤한 일은 싫어하거든요
계산이 복잡하면 아주 싫어요
그냥 바보로 살다
죽고 싶어요.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그것 어디다 쓰죠?
내게도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런 순수에의 고집은 있답니다.

호호호호!
그대도 내 손을 꽉 잡고
바보걸음을 걸어봐요
세상물결 위를
느릿느릿 웃으며 걸어봐요
마음이 무거우면 세상 물결 속으로 가라앉는답니다
그러니 가볍게 걸어봐요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유국진·시인, 경북 영덕 출생)
+ 바보야! 그게 사랑이야

바보야!
넌 정말 바보구나
그게 바로 사랑이야

네가 어미 젖꼭지를 깨물어도
네가 어미 얼굴을 꼬집어도
네가 어미에게 칭얼거리며 떼써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미소 짓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야

바보야!
차라리 바보가 되렴
그게 바로 사랑받는 비결이야

모자라는 널 감싸주고 싶고
부족한 널 도와주고 싶고
텅 빈 가슴을 채워주고 싶고
널 보면 뭔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야

바보야!
차라리 순수한 바보가 되렴
그게 바로 주고받는 사랑의 비결이야

어눌하지만 진실한 말을 하고
돌아가지만 온유한 생각을 하고
더딘 것 같지만 순리에 순종하는
너에겐 내 사랑 다 주어도 아깝지 않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야
(함영숙·시인, 하와이 거주)
+ 바보 같은 인생

내 몸이 썩어간다
신장이 썩고 위장이 썩고
항문이 썩는다
머리가 썩고 입이 썩는다
말초 신경들은 20년이 넘은 당뇨로
버티다 버티다 급기야 전의를 상실했고
위벽은 술과 담배로 거울처럼 금이 가고
항문은
먹는 것마다 활화산 용암으로 용해된 고름으로
촉촉이 썩어가는 두엄자리다
두피에서는 부스럼 딱지들로 벽이 헐고
입안은 뿌리 없이 부서진 이들로 늘 사막처럼 서걱거린다
아내는 게으른 탓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담배와 술을 끊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나는 내 몸의 어디부터 방어벽을 세워야할지 모른다
제 몸 하나 간수도 못하고
그 날 그 날이 좋아 산다
아내는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할까봐 내심 걱정이고
어머니는 살아생전 자식을 앞세울까봐 그게 두려워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하신다
그래도 난 바보처럼
술이 좋고 담배가 좋고
빨라야될 이유가 없는 적당한 게으름이 좋다
(조찬용·시인, 1953-)
+ 바보

촛불은 어둠을 밝히려
제 몸을 태우고
광대는 남을 웃기려 바보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기에 우스개 소리를 하고
다른 사람이 덜 힘들게 하기 위해
내 몸을 아끼지 않는 나는 바보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쁨을 주고 웃음을 주는 나에게
바보라고 하는 소리는 나를 슬프게 합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밉고
나를 절망 속에 빠뜨립니다

날 사랑하는 이는 어디 있나요
바보이기에 사랑하기 더 어렵던가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용기조차 없기에
뜨거운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나는
바보라고만 하던가요

오늘도 밤이 깊어 갑니다
내 사랑하는 이는 외로운 나에게
전화 하나 없이 깊은 밤을
망각 속에서 보내는가 봅니다

아 슬픈 바보의 노래는
촛불처럼 깜빡이는 전등불 밑에서
눈물에 젖어 휘돌아만 갑니다
(최범영·시인, 1958-)
+ 사람들은 모두 바보입니다

마음으로 다 할 수 없는
말을 풀어서 글을 만듭니다

가까워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모읍니다

세월이 꽃피는 계절에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바보입니다.
(정영자·시인이며 문학평론가, 1941-)
+ 시인은 바보인가 봐

시인은 타인들의 사랑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까지도
위로를 해 주고
마음을 달래주며
눈물까지 닦아주면서도

오직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달랠 줄 모르고
가슴속에 두고두고
혼자서
울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바보인가 봐
(손채주·시인)
+ 바보 詩人

제 살 베어
제 뼈 깎아
詩를 쓰고

제 돈으로 책을 찍어

친절하게도
우표까지 붙여
보내주는 바보
경제라고는 모르는 바보

물질 만능
자본주의 시대에
경제원리도 모르는 바보
그 바보가
바로 詩人이라네.
(이문조·시인)
+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
프로야구 텔레비전 중계나 보면서
고스톱 화투짝이나 만지면서
모두모두 잊어버려 이 바보야
거꾸로 치솟아오르는 피,
까짓거 모두모두 비워내는 게야
날마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세상
까짓거 눈감고 비켜가는 게야
당당함이라든가 위험한 적의敵意 따위는
모두 지워 버리는 게야
짖지 않고 또 짖지 않은 채
꼬리를 감추고 살아가는 게야
포장술집의 소주잔을 잔째로 기울이며
무너진 황성 옛터를 찾아가는 게야
아아, 바보야 바보야
오늘밤 누가 와서 나의 비애를 돌로 쳐 다오
(김종해·시인, 1941-)
+ 바보사막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 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 처음 낙타를 타 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신현정·시인, 1948-200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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