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4일 수요일

이광웅의 시 ´목숨을 걸고´


<연애에 관한 시 모음> 이광웅의 시 ´목숨을 걸고´
+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이광웅·시인, 1940-1992)
+ 연애를 하려면

육체를 위한 연애는
소득 없는 영혼에 오류를 범하고
변명 같은 후회만 가득하나니

술 취한 연애는
영혼을 병들게 하고
당신의 침상을 더럽히는
죄의 무게만 가중될 뿐이라

이성을 위한 연애가 아니라
쾌락을 위한 유희가 아니라
연애를 위한 연애가 아니라

연애를 하려면
살아 있는 영혼에
온 가슴으로 끌어안을
사랑을 위한 연애를 하라
(고은영·시인, 제주도 출생)
+ 연애

가마솥에 끓고 있는
순두부의
하얀 떨림이다.
(최대희·시인, 1958-)
+ 연애의 단면(斷面)

애인이여
당신이 나를 가지고 있다고 안심할 때 나는 당신의 밖에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의 속에 내가 있다고 하면 나는 한 덩어리 목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놓아 보내는 때 당신은 가장 많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애인이여
나는 어린 제비인데 당신의 의지는 끝이 없는 밤입니다.
(김기림·시인, 1908-?)
+ 연애의 경전

속눈썹을 치켜세울 때는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생의 깊은 비밀을
그 위에 올려놓고 있는 듯
마술을 거는 것처럼
경건하게 숨소리조차
그렇게 대문을 나서는
마스카라의 검은 마녀
그녀를 실은 나팔바지는
바람둥이 집시처럼
넓다란 입에 바람을
가득 채워 휙휙 휘파람을 불어대고

한밤에도 빵을 잔뜩 쪄와
식구들을 먹이곤 하던
젊은 날의 그녀
막내 이모 곁엔
남자가 붐볐다 늘
생기로 부풀어 오른

이스트 같던 그녀
그녀의 부푼 젖가슴
(권현형·시인, 1966-)


+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가의 따스한 자갈들,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진은영·시인, 1970-)
+ 연애시절을 떠올리다

태양을 케이크 썰고
달을 케이크 써는 기쁨이었습니다.
별을 흩뿌려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으며
달이 송편 되고 다시 이스트 빵처럼
잔뜩 부풀어지던 행복이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만난 당신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그댈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댈 앞에 놓고
다시 기다려 만나던
그 시간들의 풍요로움이라니.
그대를 만나는 시절 내내
매일이 잔치고 생일이었고
즐거운 기념일이었습니다.
생애 최고의 축제기간이었습니다.
(김하인·시인이며 소설가, 1962-)
+ 연애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안도현·시인, 1961-)
+ 나무도 연애를 한다

가만히 보면 나무도 연애를 한다
서로 그리움으로 가지를 흔들고
뿌리끼리 은밀히 만나 얘기를 나눈다
은사시나무가 온몸을 파르르 떨면
자작나무가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으며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자리에 서서도 나무는 연애를 한다
매끈한 맨몸의 물푸레나무가
굴참나무 허리를 쓰윽 문지르면
온몸을 뒤틀어 툭툭 이파리를 떨구어내는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자세히 보면 나무도
서로에게 다가가 안기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서로 엉겨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디마다 힘을 주는 것도
새들이 날아와 앉을 때에도 시침 뚝 떼고
살짝 가지만 흔들어주는 것도
다 그 때문인 것이다.
(김시탁·시인, 1963-)
+ 연애편지

연애편지는
그냥 편지가 아니다
사랑하는 한 사람
너의 마음에
헌혈을 하는 심정으로
내 심장에서
피를 뽑아 쓰고 쓴
사랑의 글이다

너와 나 서로
혈액형은 다르지만
내 사랑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너에게
수혈을 해주겠다는
소망이 담긴 헌혈증이다

너를 사랑한다는
너만 사랑하겠다는
너는 내 사람이라는
믿음과 약속이 담긴
내가 너에게만 주는
사랑의 헌혈증이다

사랑하는 한 사람
너를 위해
내 심장에서
사랑의 피를
뽑아 주었음을
증명하는 증서이다
그래서 연애편지는
사랑의 헌혈증이다
(김병훈·시인, 대구 거주)
+ 연애 편지

공부는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쿵푸입니다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이연걸이가 심신 합일의 경지에서 무공에 정진하듯,
몸과 마음을 함께 연마한다는 뜻이겠지요
공부 시간에, 그것도 국어 시간에
나는 자주 졸았습니다
이를테면, 교과서의 시가
정작 시를 멀리하게 만들던 시절이었죠
물론 졸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옆 학교 여학생이 보낸 편지를 읽던 날이었습니다
연인이란 말을 생각하면
들킨 새처럼 가슴이 떨려요......
나는 그 편지의 행간 행간에 심신의 전부를 다 던져
그녀의 떨림에 감춰진 말들을 읽어내려 애썼지요
그나마 그 짧은 글 읽기도 선생에게 들켜
조각조각 찢기고 말았지만
그 후로도 눈으로 쫓아가는 독서는
공부 시간의 쏟아지던 졸음처럼 많았지만,
내 지금 학교로부터 멀리 떠나온 눈으로
학교 담장 안의 삶들을 아련히 바라보니
선생의 시선 밖에서, 온 몸과 마음을 다 던져
풋사랑의 편지를 읽던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유일한 쿵푸였어요
(유하·시인, 1963-)
+ 연애 편지

무슨 생각을 하며
연애편지를 썼는지
너는 나처럼 솔직할 수 있느냐
너만을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쓰는 순간
내 잠지가 꼿꼿하게 섰다

온갖 감언이설로 긴 문장을 엮는다 해서
잠지로 찍은 마침표같이
확실하진 않더라
(서문인·시인, 1962-)
+ 연애편지

오늘은 어떤 하루인가?
바람도 비도
그늘과 햇살도
당신을 기쁘게 했나?
오후 내내
비와 찬 공기와 구름 아래 있으니
영혼 없이도 얼마나 즐거운지!
광물과 화학과
타액으로 이루어진
이 유물론적 수정 구슬
이 별에 처음 도착한 외계의 씨앗처럼
출렁거리고
어지럽히며!
(서동욱·시인, 1969-)
+ 연애편지 쓰는 밤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정해종·시인, 1965-)
+ 장밋빛 크리넥스 티슈 같은 삶과 연애를

장밋빛 크리넥스 티슈처럼 잘 찢어지는 삶과 연애하고 싶다.
처녀막처럼 위태로운 삶과 연애하고 싶다.
급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이 그대 속으로 뛰어들어
내장을 뒤집으며 추락하고 싶다.
성급히 타액을 흘리며, 끌어안으며, 가슴 부비는
스탠다드한 애정론이어도 좋다. 도식화된 것이어도 좋다.
입력한 만큼 화면 처리되는 것이라면 더욱 좋다.
그래도 가슴만은 언제나 탯줄보다 질긴 그리움으로
그대를 만나고 싶다.
푸른 자궁을 꿈꾸며 오늘은 내가 맘껏 그대를 유혹할 수도 있겠지.
삶이여, 내겐 왜 그대가 때때로 멀고 아득했는지
오늘은 잘 찢어지고 한없이 위태로운 내가 그대와의 연애를 위해
눈부신 알몸으로 태어나고 싶다.
(이복희·시인)
+ 질 나쁜 연애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 가는
불량한 남자가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문혜진·시인, 1976-)
* 제니스 조플린: 27살에 요절한 여성 록가수. 그녀는 날것의 음성으로 노래한 최초의 여성
로커였다
+ 외로운 연애 - 실업일기·1

마지막으로 사랑도 떠나고
인터넷이 나를 위로해 준다

노년에 내 곁을 떠나지 않는
17인치의 유일한 道伴은
늘 화사하게 웃는다

오늘도 쓸쓸해 하는 내게
수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이야기꾼,
나는 그와 연애하느라
요즘은 울 시간이 없다

청각은 흐려져도
시각만은 정정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오늘은 기도를 한다.
(김상현·시인)
+ 씁쓸한 연애

아내가 시장에 간 사이 애인과 연애를 한다
누가 볼까 쉬쉬 숨겨두었던 애인과 연애를 한다
백주에 낯뜨거운 연애를 한다
내 양 머리채를 잡고 교태를 부리는 애인은
물오른 가물치 같다 잔소리도 없다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마음, 천 개의 날개를 가진 애인과 연애를 한다
그러나 교태를 다 받아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아내의 장바구니는 너무 작고 가볍다
아내의 발은 너무 빠르다
천 개의 날개를 다 펴보기도 전에 나는 문밖부터 살핀다
애인에게 모자를 씌워 서둘러 서랍 속으로 돌려보내고
아내와 낯간지러운 연애를 한다
지구의 중심이 기우뚱 무너진다 하늘이 노랗다
(고영·시인, 경기도 안양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