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손동연의 ´가을날´ 외


<가을에 관한 시 모음> 손동연의 ´가을날´ 외

+ 가을날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 주고 있었다
(손동연·아동문학가, 1955-)
+ 가을

시골 갔다 오던
버스가 갑자기 끼이익!
섰습니다.

할머니 자루에
담겨 있던
단감 세 알이
통, 통, 통
튀어 나갔습니다.
(남호섭·아동문학가)
+ 가을 하늘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윤이현·아동문학가)
+ 가을 연못

경회루 연못에 바람이 분다
우수수 단풍잎이 떨어진다
잉어들이 잔잔히 물결을 일으키며
수면 가까이 올라와 단풍잎을 먹는다
잉어가 단풍이 되고
단풍이 잉어가 되는
가을 연못
(정호승·시인, 1950-)
+ 가을의 시

가을은 어느 날
서가書架를 정리하다 툭, 떨어진
낡은 수첩이다

눈물이 핑그르르 맺혀져 오는
먼지가 뽀얀 주소록이다
(홍수희·시인)
+ 가을 편지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유안진·시인, 1941-)
+ 가을 편지 1

그대 생각에 가을이 깊었습니다
숨기지 못하고 물들어 가는
저 나뭇잎같이
가만히
그대 마음 가는 길에
야윈 달이 뜹니다
(나호열·시인, 1953-)
+ 가을에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세영·시인, 1942-)
+ 가을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조병화·시인, 1921-2003)
+ 가을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강은교·시인, 1945-)
+ 익어가는 가을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씨앗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 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허영자·시인, 1938-)
+ 가을날

오늘 하루는 배가 고파서
저녁 들판에 나아가 길게 누웠다
왜 나는 개미가 되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더 가난했다면
허리가 가늘고 먹을 것밖에는 기쁨이 없는
까맣고 반짝거리는 벌레였다면
하루 종일이 얼마나 행복할까 먹는 일 말고는
생각해야 할 아무런 슬픔이 없다면.
(노혜경·시인, 1958-)
+ 가을 산길

맑은 바람 속을 맑은 하늘을 이고
가을 산길을 가노라면
가을 하느님,
당신의 옷자락이 보입니다.

언제나 겸허하신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한 알의 익은 도토리알 속에도 계셨고
한 알의 상수리 열매 속에도 계셨습니다.
한 알의 개암 열매 속에도 숨어 계셨구요.

언제나 무소유일 뿐인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겨우 세 살배기 어린아이의 눈빛을 하고
수풀 사이로 포르릉 포르릉
날으는 멧새를 따라가며
걸음마 연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김승희·시인, 1952-)
+ 가을엔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돌아가게 하라.
곱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가을바람 물들며 지나가듯
지상의 모든 것들 돌아가게 하라.

지난 여름엔 유난히도 슬펐어라
폭우와 태풍이 우리들에게 시련을 안겼어도
저 높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라.
누가 저처럼 영롱한 구슬을 뿌렸는가.
누가 마음들을 모조리 쏟아 펼쳤는가.

가을엔 헤어지지 말고 포옹하라.
열매들이 낙엽들이 나뭇가지를 떠남은
이별이 아니라 대지와의 만남이어라.
겨울과의 만남이어라.
봄을 잉태하기 위한 만남이어라.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떠나게 하라.
단풍물 온몸에 들이며
목소리까지도 마음까지도 물들이며
떠나게 하라.
다시 돌아오게, 돌아와 만나는 기쁨을 위해
우리 모두 돌아가고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고 만나는 날까지
책장을 넘기거나,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띄우거나
아예 눈을 감고 침묵을 하라.
자연이여, 인간이여, 우리 모두여.
(조태일·시인, 1941-1999)
+ 울어도 어울리는 계절

술을 많이 마시면
사철 어느 때든지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을에는
술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울 수 있습니다
가을이 슬퍼서가 아닙니다
가을은 나를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울면서 돌아갈 운명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가을은 인간을 울게 하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울어도
수치스럽지 않은 계절입니다
겨울에 울면 가련해 보입니다
여름에 울면 어색해 보입니다
가을은 울기에 가장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뺨을 맞아도 괜찮은 계절입니다
(방우달·시인, 195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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