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이성선의 ´하늘 악기´ 외


<등산 시모음> 이성선의 ´하늘 악기´ 외

+ 하늘 악기

높은 하늘 중턱을 길게 이어져
떠가는 태백산맥 줄기

흐르는 강

하늘에 매놓은 악기줄
신이 저녁마다 돌아와 연주한다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저 높은 길에 내 발이 올라선다

내가 하늘 악기 위를 걸으며
그분 시간을 연주하는 날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함구(緘口)

오래 산에 다니다 보니
높이 올라 먼데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래 높은 데 오르다 보니
나는 자꾸 낮은 데만 들여다보고
내가 더 낮게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매사를 깊고 넓게 생각하며
낮은 데로만 흐르는 물처럼
맑게 살아라 하고 산이 가르쳤습니다
비바람 눈보라를 산에서 만나면
그것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내 버릇이었는데
어느 사이 그것들을 피해 내려오거나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올라갈 때가 많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낮은 데가 더 잘 보이고
내가 더 고요해진다는 것을 갈수록 알겠습니다나
나도 한 마리 미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입을 다물어 나의 고요함도 산에 보탭니다
(이성부·시인, 1942-2012)
+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웁니다
사무치는 바람소리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가는 소리 들어봅니다

세월의 찌꺼기 이내 바람에 부서집니다
바람소리에 폭우처럼 떨어지고
내 마음에도 부서져 폭우처럼 비웁니다

산을 둘러앉은
한줄기 내일의 그리움을 밟고
한줄기 그리움으로 산을 오릅니다
구름처럼 떠서 가는 세월 속에
나도 어느새 구름이 됩니다

소리 없이 불러 보는 내 마음의 내일
적적한 산의 품에 담겨
내 생각은 어느새 산이 됩니다
산을 오르며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꿈을 꿉니다
홀로 서 있어도 외롭지 않을
산의 그리움을 배웁니다
(강진규·시인, 서울 출생)
+ 산을 오르는 당신

가슴 아픈
사랑의 열병
침묵으로 앓은 후
그대는 산을 올랐노라 했습니다

능선도 흐느끼는 길 따라
추억은 계곡에 버리고
미련은 소나무 가지에 걸어
이름 모를 산새 먹이로 주었노라 했습니다

모기의 흡혈 두려워
산을 멀리하던 그대의 변화
사랑의 아픔이
깊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대가 다녀간 높고 낮은 산
꺾어진 가지마다 걸어놓은 미련
아직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것은
산새들도 안타까워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손희락·문학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산울림

산에 올라
나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땀을 훔친다.
먼 산을 바라보며
나를 보낸다.

야호~~~
그 소리에 마음을 담아
멀리멀리 보낸다.

나를 떠난 소리는
마음을 헤아리기도 한 듯
산을 울려 다시 돌아온다.
산에 오를 때마다 정다운 대화를 나눈다.

풀, 나무, 돌, 바람, 새, 벌레, 햇빛, 구름,...
언제나 변치 않고
푸르름을 내뿜는
네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구나.
(허정虛靜·시인)
+ 산에 가면

산에 가면
비바람만 불어도
서로서로 어깨를 다독여 주는
나무를 본다

산에 가면
뇌성벽력 요란해도
같이 비를 맞아 주는
바위의 묵묵함을 본다

철 따라 단장하는
산의 순한 세상은
천 년을 살고도 만 년을
늙지 않는 모습을 본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 가뻐
치부 속 깊은 숨 몰아쉴 때
우린 마음을 털어

산 속에서 만나는 이름 모르는 이들
덥석 손잡아 주진 못해도
반가운 인사로 복 지으며

천연스런 산이 되자
산에 가면
산에 가면
(혜유 이병석·시인)
+ 산 위에서

산 위에서 보면
바다는 들판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새싹처럼 솟아오르고 싶은
고기들의 설렘을.

산 위에서 보면
들판은 바다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고기비늘처럼 번득이고 싶은
새싹들의 설렘을.

산 위에 서 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순한 짐승
그러나 너는 알 거야
한 마리 새처럼 날고 싶은
내 마음의 설렘을.
(김원기·아동문학가, 1937-1988).
+ 등산·4

등산하는 목적을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하는 재미를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얻은 걸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남은 걸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다네.
(김원식·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 내려다보는 산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눈빛, 그 서늘한 눈빛 때문이다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모든 것의 등뒤를 비추는
그 서늘한 눈빛 때문이다

나의 이 장난 같은 일상 가운데
엄습해오는 그 눈빛
모든 것의 등뒤에 와
퍼부어대는 소나기 같은 눈빛 때문이다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내려다보는 산은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무산·노동운동가 시인, 1955-)
+ 도봉산

굽이굽이
길다란 능선들의

저 육중한 몸뚱이
하늘 아래 퍼질러 누워

그저 햇살이나 쪼이고
바람과 노니는 듯

빈둥빈둥
게으름이나 피우는 듯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틈에
너의 온몸

연둣빛 생명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가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속
너의 찬란한 목숨
(정연복·시인, 1957-)
+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 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한비야·오지 여행가, 195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법정 스님의 ´물처럼 흘러라´ 외 ">